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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11-01-15
미디어 중앙일보_영화배우 이혜영 좌담

[j Story] 통혁당 20년 옥고 … 처음처럼 글자 쓴 좌파 지성인 신영복 교수

과거 우린 ‘소통’ 아닌 ‘소탕’을 해왔다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다. 이념적으로 오른쪽이건 왼쪽이건 다른 방향으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면 그게 감옥이다. 이념이 아니라도 타인에 대한 편견과 자기 콤플렉스가 우리를 옭아맨다. 자유로운 발상과 창조적 행동이 함께 갇힌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 좌파 지식인인 신영복(70) 성공회대 석좌교수. 마흔일곱 살이 되기까지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출소 후 줄곧 “소통과 변화를 가로막는 감옥에서 탈옥하라”는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다. j의 객원기자인 영화배우 이혜영(전 SBS 앵커)씨가 지난달 31일 신 교수를 만났다.

 

서울 필동 한국의집 문향루에서 마주 앉은 신영복 교수와 이혜영 객원기자. 이 기자는 부친 고(故) 이만희 감독이 만든 영화 DVD를, 신 교수는 자신이 쓴 책을 서로에게 선물했다. 노래를 끈질기게 청한 이 기자와 별 수 없이 두 곡이나 부른 신 교수가 활짝 웃고 있다.

 정리=성시윤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 통일혁명당 사건이 뭐예요?

 (신 교수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될 당시 그는 스물일곱 살의 육군 중위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경제학원론’을 가르치고 있었다.)

 “제가 구속된 1968년은 김신조 사건이 나고,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서 나포되고, 예비군 동원법이 만들어지고, 3선 개헌이 추진되고,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치열하게 벌어지던 해예요. 이런 시기에 간첩단 사건이 터졌는데, 거기에 청년학생운동이 동일 사건으로 엮인 거죠. 그 접점에 제가 있었고요.”

● 감옥 시절을 ‘대학 시절’로 표현하시더군요.

 “제가 원래는 무기형을 받았기 때문에 만기출소를 기다릴 순 없는 처지였죠. 그래서 하루하루 깨닫고 배우는 게 있어야 되겠다 생각했어요. 원래 교사 아들로 학교 사택에서 태어나서 (감옥 가기 전까지) 줄곧 학교에만 있었어요. 그래서 감옥 역시 각성이나 변화의 계기가 되는 학교로 받아들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 그래도 잃은 것이 있을 텐데요.

 “많이 잃었죠. 영어 단어도 많이 잊어먹고 가깝게 지냈던 친구들도 잃고…. 잃은 게 참 많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깨달은 것도 많으니… 뭐 그런 게 인생 아니겠어요.”

● 긍정적으로만 생각하시네요. 그런데 (오랫동안 수감됐는데) 언제 사랑할 시간이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혼하셨더라고요.

 “출소 후에.”(웃음)

● 2008년인가, 우주인 고산씨 주례 서셨지요?

 “네, 그런데 주례로서는 제가 좀 적절하지 않다고 봐요. 신랑·신부들은 제가 쓴 책도 읽고 해서 좋아하는데 가족들은 ‘감옥에 있던 사람을 왜 주례로 모셨어?’ 그러거든요. 고산씨 경우는 양가 부모님이 좋다고 하셔서….”

● 강연 요청을 자주 거절하시는 이유도 그런 건가요?

 “그래요. 보수적인 단체 같은 곳에서는 제 얘기를 듣는 사람들이 조금 불편할 수 있거든요. 젊은 학생들은 몰라도 산전수전 다 겪고 사회적 이해관계가 형성돼 있는 상태에서는 논쟁이 논쟁으로만 끝나고 별 성과가 없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 그래도 교수님을 서민의 술로 접할 수 있으니까요, 뭐. ‘처음처럼’이 선생님 글씨 맞죠?

 “제가 있는 성공회대에서 제 글씨와 그림으로 달력을 만들어요. ‘처음처럼’도 그런 달력 중 하나에 실려 있었어요. 96년에 주류회사에서 달력을 보고선 제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제 글씨가 상업적 용도로 쓰이는 게 별로 좋지 않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제 글씨는, 서민들이 쓰는 ‘민체(民體)’거든요. 가장 서민적인 술의 이름으로 가는 것이 민체의 팔자라고 생각했습니다.”

● 약주는 많이 하세요?

 “오랜 기간 (술을) 트레이닝할 기회가 없어 잘 먹진 못합니다. 그러나 무슨 술이든, 한두 잔은 따라갑니다.”

● 교육감이나 정치에 대한 생각은 없으신가요?

 (지난해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진보계열에서 그를 서울시교육감 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신 교수는 고사했다.)

 “제가 교육계에 있긴 하지만 교육감은 젊은 사람이 해야 해요. 교육은 10년, 20년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젊은 분들이 장기 프로젝트로 열심히 하는 게 옳아요.”

● ‘변방의식’이란 어떤 것이죠.

 (신 교수는 최근 나온 서울대 강연집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에서 ‘변화하기 위해서는 변방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개인이든 사회든 부단히 변화해야 됩니다. 그런데, 중심부는 변화할 의지가 없어요. 반드시 변방이 변화의 중심이 돼요. 역사적으로 보면 문명의 중심도 계속 변방으로 옮겨오잖아요. 그 이유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해요. 변방이되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하는 거죠.”

● 교수님은 중심부 콤플렉스가 없으세요?

 “제 위치는 우리 사회의 중심부는 분명 아니고요. 저는 지식인은 중심부에 서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비판적 관점에서 대안담론, 비판담론을 만들어 내는 게 지식인의 임무죠. 제게 콤플렉스가 비교적 적은 이유는 변방과 마이너리티(minority)의 위치가 지식인으로서 저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 그런 콤플렉스가 우리 사회의 소통을 막는 장애물일까요.

 “진정한 소통이란 ‘너는 그렇게 생각해라. 나는 이렇게 생각하겠다. 그냥 공존하자’가 아니에요. 차이나 다양성을 내가 변화할 수 있는 ‘반가운 만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근대의 패러다임은 개인·기업·국가 모두 자기 존재를 강화하는 것이었죠. 게다가 우리는 한국전쟁의 비극을 경험했어요. 60대 이상의 세대로선 ‘소통’이 아니라 ‘소탕’을 해온 거죠. 그들에게 공존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잖아요. 이런 문화가 우리 사회 일각에 아직도 완강하게 버티고 있어요. 또 보수 구조가 아주 완고하기 때문에 좌우의 바람직한 균형, 대칭적 균형이 안 되는 것 같아요.”

● 진보 쪽에서도 자신과 관점이 다른 사람과는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런 것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후배 중 일부는 저더러 ‘왜 중앙일보하고 (인터뷰) 하느냐, 한겨레하고 해야지’ 해요. 하지만 많은 사람이 ‘한겨레 독자들은 선생님 글 안 읽어도 돼. 중앙일보 독자들하고 만나는 게 필요하다’고 해요. 제도권 언론 중에선 중앙일보가 가능성 있는 신문이니까…. 나는 그런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봐요. 자기 보신을 한다거나, 자기 이미지 관리 때문에 좁은 범위에서 행동하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 천안함, 연평도 사건 이후 진보계의 대응에 대한 비판이 있는데요.

 “사건 자체에서부터 출발하는 사고보다는, 우리 사회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재규정하는 관점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민족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두 개의 기본적인 축이 있다고 봐요. 하나는 개방성이고, 하나는 자기주체성이었죠. 역사적 구조에서 보면, 남북관계란 것은 단지 이념적 분단이라기보다는 우리 민족이 갖고 있던 두 개의 축이 밖으로 드러난 측면이 있어요. 최근의 남북관계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굉장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던 면이 있어요. 그러한 과정에서 천안함 또는 연평도 사건이 돌출된 면이 있습니다.”

● 통일은 언제쯤 될까요?

 “저는 무리한 통일에는 반대합니다. 통일할 수 있는 역량도 아직 갖춰지지 않았고요. 저는 ‘통일’을 한자로 쓸 때, 거느릴 통(統) 자를 쓰지 않고, 소통할 통(通)자를 쓰기도 합니다.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고 평화를 정착하는 기간을 그냥 계속 끌고 가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시점에,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시기에 적절한 형태의 통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생각합니다.”

● 성공회대 교수님이라고 했더니 신부님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종교는 없으시죠?

 “예, 없습니다. 하지만 ‘도구로서의 신’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가톨릭 신자인 친구가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는데 그분이 ‘참,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을 수 있나, 하느님이 원망스럽다’ 이런 얘길 했대요. 그러면서 그 친구는 ‘우리가 누군가 원망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해요. 하지만 저는 원망 안 해요. 제가 독방에 있을 때 ‘왜 다른 사람은 자살도 하는데 나는 무기징역이면서 이 추운 독방에 앉아 자살하지 않고 앉아 있나’ 그런 고민을 심각히 한 적이 있어요. 추운 겨울에 독방에 있으면 신문 펼친 정도 크기의 햇볕을 두 시간가량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던 경험이 있어요. 인생이란 20년의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2시간의 햇볕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그때 했습니다. 나는 정말 그 어느 것도 원망하지 않아요.”

● 그 햇볕에서 ‘햇볕정책’이 나온 건가요?

 “글쎄요. 그런데 바람이 못 벗기는 옷을 햇볕이란 수단으로 벗긴다는, 그런 전략적 개념이라기보다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랑, 굶주리는 북녘 동포나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관심 같은 것이 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 교수님을 해탈한 부처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 이미지가 부담스럽진 않으세요?

 “부담스럽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교도소에서 검열을 예상하고, 또 가족들이 읽을 글이기 때문에 엄격한 자기 검열을 하고 정제된 글을 썼었잖아요. 그 글을 읽은 독자들은 또 그런 글을 저한테 요구해요. 그래서 지금 감옥에서 나와서도 얼마나 불편한지 몰라요. 가능하면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 안 만나고 싶고…. 왜냐하면 또 빳빳하게 서 있어야 하고, 뭐 허술한 이야기나 싱거운 농담도 못하고 불편하니까….” 

1968~1988 감옥의 추억

“교도소 축구서 공격 맡았죠 … 이기면 버터를 얻었거든요”


신 교수는 j의 요청에 1면 제호와 ‘함께 여는 새날’이라는 글귀를 흔쾌히 써줬다.
 

● 붓글씨로도 유명하신데, 언제 공부하신 거예요.

 “어려서 할아버지 사랑방에서부터 죽 서예를 익혔고, 또 교도소에 있을 때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죠. 좋은 선생님도 만났고요.”

● 좋은 선생님은 거기에 어떻게 들어오셨죠.

 “저 있던 교도소에 소장이 새로 부임하셨어요. 이분이 대전지역에 굉장한 명필(名筆)이 한 분 계시다는 것을 아셨어요. 당시 우리나라에 생존한 분 중에는 유일하게 중국 고궁박물관에 글씨가 들어간 분이셨어요. 신임 소장이 그분 글씨를 하나 받을 욕심으로 교도소 서도반(書道班)에 그분을 모셔왔어요. 교도소에 불교반·가톨릭반·서도반 이런 게 있었는데, 말하자면 서도반을 판 것이죠. 그래서 그분이 교도소에 오셔서 제 글씨를 보시게 됐어요. 교도소장에게 저에 대한 얘기를 들으시곤 ‘이 사람이 지금 귀양 와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셨대요. 그러더니 매주 하루씩을 오셔서 글씨를 가르쳐 주셨어요. 아마 한 달쯤 오시고 나서 소장이 글씨 한 장을 얻지 않았나 생각돼요. 더 이상 안 오셔도 될 텐데, 이 선생님이 계속 오셨어요. 7년 동안이나요. 고(故) 정향(靜香) 조병호(1914~2005) 선생이셨죠.”

 신 교수는 그의 글씨체를 감옥에서 완성했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도 이 글씨체로 썼다. 그래서 그 글씨체를 ‘옥중서신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 편지들을 모은 것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년)이라는 책이다.

● 나중에 책을 내실 생각으로 편지를 쓰셨나요.

 “그 글에는 고민이나 원망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교도소 당국의 검열을 통과해야 하는 편지니까요. 그 책만 보면 ‘아주 반듯하게 감옥살이를 했구나.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하는 독자가 많죠. 사실은 괴로운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편지는 당시 유일하게 집필이 허용된 공간이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쓸 수 있었죠. 제가 감옥이라는, 판이한 공간에 던져졌을 때 느끼는 충격이 많았어요. ‘그걸 그냥 두면 그냥 물처럼 흘러가서 다 잊어버리겠구나, 이걸 어딘가 기록해 두면 언젠가 다시 내가 생환할 수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한 달간 내가 고민하고 생각했던 걸 다 정리해 썼던 것이죠.”

● 당시 재소자들과의 관계는 어떠셨나요.

 “교도소에서 한동안 제가 ‘왕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제게 약간의 거리감을 두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교도소 안에서 우리가 일하는 공장과 다른 재소자들이 일하는 공장의 축구 대표팀이 시합을 했는데 이겨서 상으로 버터를 타왔어요. 그 버터를 저녁 국통에 집어넣으면서 선수 하나가 연설을 해요. ‘이 버터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공장 축구선수들이 피나는 접전 끝에 몇 대 몇으로 이기고 따온 버터입니다.’ 그러니까 다들 막 박수를 쳐요. 그래서 ‘내가 축구선수를 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교도소는 운동장이 작아 축구선수가 11명이 아니고 7명이에요. 한 공장에 100명쯤 되는데, 그중에서 7명이면…. 교도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다 운동을 잘해요. 싸움도 잘하고. 그런데 그 일곱 명에 제가 들어갔어요. 그러고 그 공격 선봉을 제가 맡아서…. 제가 성공회대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도 교수 축구팀을 했죠.”

● 감옥에서 부르셨다는 18번 레퍼토리 ‘시냇물’을 들어봐도 돼요?

 “18번요?”

● 교수님의 18번요.

 “노래요?”

● 네, 왜냐하면 저는 그 노래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한번 들어보고 싶어서요.

 “그게… 안 불러도 돼요. 가사만 전달하면 돼요. 원래 곡이란 것은 가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니까.”

● 그러니까 어떻게 전달하셨는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신 교수는 애창곡을 뽑고야 말았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그러고 내친김에, 그가 감옥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다는 영화 ‘부베의 연인’ 주제가도 부르고야 말았다.

● 노래방 같은 데도 가세요?

“서화 전시회 끝나고 한번 갔었는데, 참 좋더라고요. ‘아, 내가 공부할 노래도 참 많구나’하고 느껴서 ‘시내 나왔다가 한두 시간 빌 때에 혼자 가서 연습해야지’했는데 이건 쑥스러워서….”

신영복 교수

1941년 경남 의령 출생

1959 서울대 경제학과 입학

1968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1988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1989 성공회대 경제학과 강사

1998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06년 정년 퇴임. 현 석좌교수
 


j 칵테일 >> TBC PD 출신과 48세에 결혼 … 혼인 한 달 만에 후배 주례 서기도

신영복 교수는 출소 이듬해인 1989년 일곱 살 연하의 방송국 PD와 결혼했다.

 “출소했을 당시 부모님이 다 병석에 누워 계셨어요. 고향 어른들이 올라오셔서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빨리 결혼하라’고 독촉하셨죠. 다행히 가까운 후배나 친구들이 내가 출소할 때에 맞춰 결혼할 만한 사람을 봐두었어요.”

 신 교수가 만난 여인은 일곱 살 연하의 KBS PD 유영순(63)씨였다. 69년 옛 중앙매스컴 공채 6기로 동양방송(TBC)에 입사해 아나운서와 라디오PD를 했다. 신군부의 방송 통폐합 정책에 따라 80년 TBC가 문을 닫은 이후 KBS 소속이 됐다.

 둘은 첫 만남에서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신 교수의 진지한 모습에 대비를 하면 ‘파격’인 셈이다.

 “감옥에 있는 동안에 사람을 느끼는 감각이 많이 연마됐어요. 감옥에서 10년 정도 보내니 딱 얼굴만 보면 죄명이 무엇인지 알아맞히는 수준이 되더라고요. 더욱이 제가 별로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중간에서 만남을 추진한 사람들이 사실은 중간이 아니고 내 편인 덕분이었어요.”

 부부는 결혼 이듬해, 그러니까 신 교수 나이 쉰에 아들을 하나 보았다. 현재 서울대를 다니고 있다.

 “아들이 09학번이고, 제가 59학번입니다. 딱 50년 후배죠. 제가 아들에게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없어요. 워낙 세대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하지만 피차간에 신뢰가 있는 편한 사이입니다.”

결혼 이후에 신 교수가 아들을 보기 전에 먼저 한 것이 있다. 그는 결혼 한 달 만에 주례를 섰다. 자신도 신혼이었지만 후배의 주례 청탁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중앙일보] 2011.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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