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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와 나



 

1995년 서예작품집『손잡고더불어』에서

서예와 나

신영복

내가 붓글씨와 인연을 맺게 된것은
어린 시절 할아버님의 문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할아버님의 사랑방에 불려가서
유지(油紙)에다 습자하였다.
할아버님께서는 친구분들이 방문하시기만 하면
나를 불러 글씨를 쓰게 하셨다.
그러면 할아버님의 친구분들은 푸짐한 칭찬과 함께
자상한 가르침을 아끼지 않으시는 것이었다.


이때의 붓글씨란 한낱 습작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의 정서는 훗날까지도 매우 친숙한 것으로
나의 내부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0여 년 후 내가 옥중에서 할어버님의 묘비명을 쓰게 되었을 때,
나의 정서 속에 깊숙이 들어와있는 당시의 기억을
다시 한번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4.19혁명 직후 대학을 중심으로 우리 것에 대한 자각이 싹텄던 시절이 있었다.
나의 가까운 친구들 중에는 국악, 탈춤,굿 등을 배우기 시작하여
그쪽으로 심취해간 이들이 상당수 있다.
당시 대학 2학년이던 나는
그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붓글씨를 상기하고
붓과 벼루를 다시 꺼내놓았다.
학교 게시판의 공고문을 써붙이기도 하고
행사 때는 아치의 글씨를 맡아서 썼다.


다른 대학교의 아치를 쓴 기억도 있다.
당시 설립되었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부설 한국경제연구소의 목각현판이
나의 글씨로 씌어졌다고 기억된다.


그때까지 남들 앞에 별로 꺼내놓고 싶지 않았던 붓글씨가
적어도 나의 경우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만연했던
민족적 패배의식과 좌절감을 극복하는 작은 계기로
나의 삶 속에 복원되게 된다.


내가 서도에 상당히 많은 시간을 쏟게 되는 것은
역시 20여 년의 옥중생활에서이다.
재소자 준수사항, 동상 예방수칙 등의 공장 부착물들을
붓글씨로 써붙이는 일이 계기가 되어
교도소내에 불교방·기독교방·카톨릭방 등에 추가하여
동양화방·서도방이 신설되면서 상당한 시간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온종일 글씨를 썼던 기간도 7,8년은 되었다.


나는 당시 주로 동양고전을 읽고 있었는데
그것은 교도소 규정이 사전·경전을 제외하고
3권 이상 책을 소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내가 동양고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나도 모르게 내 속에 들어와 앉은
서구적 사고방식을 반성하기 위해서였다.
시경·주역에서부터 섭렵하기 시작한 동양고전 공부는
무엇보다 나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어느 정도의 비판적 관점을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되던 나의 사고내용이
매우 취약한 것임을 깊이 반성하게 하였다.


특히 이 기간을 회상하면서 가장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 선생님과의 생활이다.
노촌 선생님과 한 감방에서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깥에 있었더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
노촌 선생님은 우리나라 4대 문장가의 한분인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선생의 후손으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선생과 벽초(碧初)홍명희(洪命喜)선생께 사사를 받으신 분으로
드물게 보는 한학의 대가였다.
뿐만아니라 그러한 출신과 성분, 그러한 연배에서는 뵙기 어려울 정도로
진보적인 사상을 체득하고 계신 분이었다.
진보적인사상이 그냥 진보적인 것으로 드러나지 않고
우리의 전통과 정서가 그 속에 무르녹아 있는
중후한 인격을 표현되는 그런 분이었다.
선생님의 술회와 같이 나는 선생님의 평생에
가장 오랫동안 한방에서 함께 지낸 사람이다.
하루 24시간 내내 무릎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징역살이였기 때문이다.
당시 노촌 선생님께서는 가전되어 오던 의병문헌을 들여와 번역하셨는데,
그때 번역하신 초고가 93년 10월에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으로 햇빛을 보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의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그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필자는 그 시절 노촌선생님과 한방에서 그 번역 일의 일단을 도와드렸다기보다
그것을 통하여 오히려 선생님의 과분 하신 훈도와 애정을 입을 수 있었음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노촌 선생님은 많은 분들께서 한결같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깊은 한학의 온축위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선비의 기개로 확고한 사관을 토대에 굳건히 서서 해방 전후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어오신 분이다.
이를테면 조선 봉건사회, 일제하 식민지사회, 6.25전쟁, 사회주의사회,
20여 년의 감옥사회, 그리고 1980년대의 자본주의사회를 두루 겪어오신 분이다.>


노촌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은 글씨를 모른다고 하시지만
나는 지금껏 많은 글씨를 보아오면서도
항상 노촌선생님의 글씨를 잊지 못하고 있다.
학문과 인격과 서예에 대한 높은 안목이 하나로 어루러져 이루어내는경지는
이른바 글씨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노촌 선생님과 함께 하였던 시절
선생님의 번역을 도우며 한문공부도 하였지만
그와 아울러 서도의 정신과 필법, 그리고 우리의 전통과 정서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에 대하여 배울수 있었음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서도반이 만들어진 후 처음 한동안은
아버님께서 들여주시는 법첩을 임서하고 서론집을 읽었다.
지금도 다른 것에 마음을 두고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때는 글씨보다는 고전의 탐독에 마음이 더 기울어 있었다.


나는 나의 붓글씨와 함께 잊을 수 없는 두 분의 선생님을
역설적이게도 옥중에서 모시게 된다.
처음 서도 선생님으로 교도소 당국에서 초빙한 선생님은
만당(晩堂) 성주표(成周杓)선생님이다.
해서(諧書)와 행서(行書), 특히 대자(大子) 현판(縣板) 글씨로 유명하신 분이었다.
속리산 법주사, 동래 범어사 등 전국의 사찰에 많은 편액이 걸려있고
당시에는 임경업 장군 사당의 현판을 쓰시기도 하였다.
만당 선생님은 특히 성친왕(成親王) 해서(諧書) 법첩과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 행서첩으로 임서하게 하였고
현판 글씨를 서도의 최고 형식으로 꼽았다.
회심작을 얻으면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해 당장 붓을 놓고 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무슨 낙으로 사는가를 속으로 묻는 분이셨다.
도와 풍류를 함께 갖추신 분으로 기억된다.


또 한분의 선생님은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 선생님이다.
정향 선생님은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선생께 사사를 받으셨으며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소당(小棠) 김석준(金奭準), 백당(白堂) 현채(玄采)의
정통을 이은 분으로 일컬어진다.
일찍이 1933년에 시서화사(詩書畵社)에 입문하시고
1939년 제1회 선전에 입선하자
일본인들이 벌인 전시회에 참여하였다는 지인들의 비판을 받고
이후 서도계와 인연을 멀리하신 분이다.
우하 선생은 이완용 암살의 배후로 나중에 사면되기는 하였지만
사형을 받으셨던 분이고
위창 선생 역시 33인의 한분이어서 그 제자인 정향 선생님 역시
일제하에서부터 은거하시게 된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분 가운데 중국 고궁박물관과 역사박물관에
글씨가 소장된 유일한 분이지만
당신은 막상 서예가라는 말은 매우 싫어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서(篆書)의 권위자로
특히 와전(瓦篆)에는 독보적인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교도소 당국이 정향 선생님을 교도소로 모셔와
우리들의 글씨를 선생님께 보여드린 것이 인연이 되었다.
교도소에는 일반사범들만 있는 줄로 알았던 선생님으로서는
이들이 사상범임을 알게 되고 상당한 충격을 받으신 것으로 안다.
그 후 선생님은 우리를 귀양온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
평양감사를 조부로 두셨던 선생님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도소 당국이 선생님을 모셔오기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을 때에도
매주 하루를 할애하여 우리들을 지도하셨다.


내가 전주교도소로 이송되기 전까지 6년여를 한번도 거르지 않고 오셨다.
심지어는 교도소의 허락을 받아 선생님의 자택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당신이 소장하고 계신 명필들의 진적을
일일이 짚어가며 일러주시기까지 하셨다.
당신 글씨는 배우지 말고 옛 명필들의 글씨를 배우라고 하셨다.
나는 예서와 전서 외에 특히 많은 시간을 미불(米芾)임서에 바쳤다.


특히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과분한 애정과 엄한 지도를 받았다.
언젠가 교도소 당국이 독지가에게 사례할 넉 자 현판 글씨를
내가 쓰게 되었는데
나로서는 그 글씨를 표구하여 보내기 전에
정향 선생님의 제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주일 동안 습자하여 선생님께 보여드리면
아무말 없이 그 글씨 위에다 교정을 해버리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를 무려 일곱 번
그러니까 약 2개월을 넉 자만 쓴 셈이 되었다.


정향 선생님께서는 서예가란 호칭을 매우 싫어하셨다.
까닭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고래로 직업적인 서예가란
있지 않다는 것 때문이다.
완당(阮堂)·원교(圓嶠)만 보더라도 서예가이기 이전에
모두가 먼저 뛰어난 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퇴계(退溪) 이황(李滉),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등
우리나라의 명필은 어김없이 학자이고 처사였다.


글씨를 글씨로만 쓰는 것은 사자관에 지나지 않으며
더구나 상품화된 서예란 아예서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굳게 가지신 분이었다.
인격과 학문의 온축이 그 바닥에 깔리지 않는 글씨란
글씨일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 였다.
서예는 예부터 6예의 하나로 기본적으로 '인간학'이라는 것이었다.


정향 선생님은 물론 한글 서예를 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예의 정신은 한글이나 한문이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된다.
나는 한문을 쓰면서도 한편으로 혼자서 한글을 썼다.
한글은 물론 궁체와 고체를 썼다.
그러나 궁체나 고체를 쓰는 동안 나는 차츰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조나 별곡, 성경귀절 등을 쓸 때에는 느끼지 못하던 것을
특히 민요·저항시·민중시를 궁체나 고체로 쓸 때에는
아무래도 어색함을 금할 수 없었다.
유리그릇에 된장을 담은 느낌이었다.
형식과 내용이 맞지 않았다.
쓰기는 민중시를 쓰고 싶고 글씨는 궁체라는 모순 때문에
매우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그때 작은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어머님의 모필체의 서한이었다.
당시 칠순의 할머니였던 어머님의 붓글씨는 물론 궁체가 아니다.
칠순의 노모가 옥중의 아들에게 보내는 서한은
설령 그 사연의 절절함이 아니더라도 유다른 감개가 없을 수 없지만,
나는 그 내용의 절절함이 아닌 그것의 형식,
즉 글씨의 모양에서 매우 중요한 느낌을 받게 된다.
어머님의 서한을 임서하면서
나는 고아하고 품위있는 귀족적 형식이 아닌
서민들의 정서가 담긴 소박하고 어수룩한 글씨체에 주목하게 되고
그런 형식을 지향하게 된다.


한글은 한문과는 달리 그림이 아니다.
기호일 뿐이다.
극도로 추상화된 기호로서의 각박한 한글체를
궁체가 그 고아한 형식으로 어느정도 누그러뜨려주는 면은 충분히 인정된다.
그러나 궁체는 노봉·편필이라는 단순한 필법, 그리고 정형화된 결구로 말미암아
글의 내용에 상응하는 변화를 담기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에
항상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어머님의 모필 서한은
나에게 어떤 방향을 예시해주었다고 생각된다.
어머님의 글씨에서 느껴지는 서민들의 체취와 정서는
궁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미학으로 이해되었다.


그림과 글씨의 결정적인 차이를 한 가지만 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림은 '구체적 형식에 추상적 내용'인 반면
글씨는 '추상적 형식에 구체적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한자의 경우는 그 형식이 원래 상형·지사 등
그림인 경우도 많아서
서(書)는 서(敍) 또는 여야(如也)라 하였다.


그러나 한글의 경우는
모든 글자가 그 형식이 극도로 추상화된 기호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그림에서 그 내용을 어떻게 형상화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글에서는 그 형식을 어떻게 구상화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선 기존의 한문서법의 5체, 즉 전예해행초(篆隸楷行草)의 다양한 획을
한글에 도입하는 시도를 하게 된다.
한편 글자 한 자로써 불가능하거나 불충분한 경우는
여러 글자를 연결하여 표현하는 새로운 구성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나의 시도에 대하여 서예의 정통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궁체를 한글서예의 정통으로 계승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도의 정통은 어디까지나 서법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서법은 집필, 묵법, 용필, 필세 등 그 법이 넓고 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본은 한자이든 한글이든 결국 필법으로 요약된다.
중봉(中鋒) 관직(管直) 장봉(藏鋒) 현완(懸腕) 현비(懸臂) 등 용필(用筆)의 요체를 의미한다.
붓이라는 매우 불편한 필기도구를 효과적으로 운필할 수 있는
이른바 '방법에 관한 법'이다.
바둑에 정석이 있고 각종의 운동에 기본적인 틀(form)이 있듯이
붓의 운필(handing)에 있어서도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이룩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그것이 이른바 용필로서의 필법이다.


그리고 이 필법은 현재 거의 최고수준으로 완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앞으로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필법이 개발될 수도 있지만
전통·정통의 계승은 이 필법의 계승으로서의 의미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통서의 또 하나의 문제는
법첩의 임서와 같이 과거의 명필들이 도달한 미학의 계승문제이다.
명필들의 글씨에서 그 필법·사상·인격 그리고 미학을 읽을 수 있고
나아가 그의 사상과 미학을 통하여
당대의 문화와 사회상, 그리고 시대미학을 읽을 수 있다.
위진대(魏晋代)의 해행초(楷行草), 주진한대(周秦漢代)의 전예(篆隸)에서부터
조선 중기의 동국진체(東國眞體)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문화적 완성체로서의 서체가 갖는 의미 역시
전통·정통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명필들의 임서는 상기 두 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서예란 그것을 글씨로써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격과 사상, 그리고 당대 사회의 미학을
오늘의 과제와 정서로 지양해내는 작업이어야 하며
더구나 이 모든 것을
우리시대의 것으로 형상화하는 동시에
나의 것으로 이룩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쩌면 서도의 차원을 넘는 것이다.
명필들의 인격·사상·미학을 과제로 하여야 할 뿐 아니라
그 시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다른 모든 예술장르와 마찬가지로
서예도 현재의 사회·역사적 과제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서도의 전통·정통의 문제 역시
계승과 발전의 일반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일제치하에서의 한글서예는
그것이 설령 당시의 민중적 시대미학에 못 미치는 것이라 하더라도
한글 그 자체만으로서도 충분히 민족적 과제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토대와 상부구조가 변화된 상황에서는
한문서예든 한글서예든 어떠한 사상과 미학이 유의미한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계승과 발전의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무릇 모든 예술활동은 그 개인에 봉사하고
그 사회에 봉사하고
나아가 그 역사창조에 참여하여야 한다.
서예는 이런 점에서 다른 예술장르에 비하여 매우 특이한 전통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서예는 다른 분야에 비하여
전통이 완고하게 고수되고 있는 반면
그 사람과 그 작품의 통일성이
그 어떤 예술작품의 경우보다
강하게 나타나고 강하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법이 교조화하는 매우 부정적인 측면이 있음에 비하여
반대로 글씨에서 인격을 읽으려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이 '사람과 작품의 통일'은 매우 귀중한 전통이다.
예술작품과 예술활동이 당자의 인격을 높이는 일과 함께 추구된다는 것은
예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는 의미로 나는 받아들인다.
훌륭한 글씨를 쓰기 위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훌륭한 사람이란 당대 사회의 과제를 비켜가지 않고
그의 삶으로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서예는 그림과 달라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메시지를 직접 전하는 것이다.
그 사회성과 역사성이 직접으로 표현된다.
이 점이 서예가 다른 장르에 비하여 사회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이유가 된다.
따라서
서예가 어떠한 전통 위에서
어떠한 내용을
어떠한 형식으로 표현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많지는 않지만 나는
가능하면 우리시대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글들을 쓰고
민중의 역량과 정서를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물론 그 형식에 있어서도
아직 답보를 거듭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형식문제에 있어서의 고민은
그것이 내용과 조화되어야 한다는 일차적 과제 이외에
보는 사람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어야 된다는 나의 생각 때문에
한층 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람들로부터 경탄을 자아냄으로써 멀어지기보다는
친근감과 자신감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가까이 다가가서
민중적 역량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고 공감할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서예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곧 나의 사회학이며
나의 인간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글씨는 계속 마음속에만 들어있고
좀체로 종이 위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씨를 쓰거나 남들 앞에 내어보이는 까닭은
그러한 고민을 함께 나눔으로써
서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란 언제나 여럿이 더불어 달성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