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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15>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20년옥중 사색의 편지묶음 낮은 음으로 실천을 말하다
통혁당 무기수가 겹겹의 검열속 가족에 띄운 편지
단기적 실천론에 매몰된 진보 운동의 早老를경계
출소후엔 중국 고전의 재해석 통해 상생관계 강조

 

 

1988년 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전해 6월 항쟁으로 분출된 민주화 열기가 식을 줄 몰랐고, 9월에 열릴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국가적 역량이 총동원되고 있었다.

 

그해 여름 통혁당 무기수 신영복은 광복절 특별가석방으로 대전교도소 문을 나섰다. 당시 나이 47세, 수감된 지 정확히 20년 20일 만이었다.

 

사람들은 신영복을 알고 있었다. 그가 감옥에서 가족에게 띄웠던 편지 중 일부가 4번에 걸쳐 주간 <평화신문>에 연재됐던 까닭이다. 사람들은 오랜 영어살이에도 지성과 기품을 잃지 않은 미문(美文)의 편지 발신자에게 호감을 느꼈다.

 

형 확정 이후 18년 간 보낸 봉함엽서를 가족들은 다행히 잘 간수하고 있었고, 또다른 통혁당 수감자 오병철의 부인이 경영하던 햇빛출판사가 책으로 묶었다. 인쇄 날짜가 저자의 출소 날짜와 같은 서간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하 <사색>)은 이렇게 탄생했다. 독자들은 열렬히 호응했고 88년 여름은 더욱 뜨거웠다.

 

하지만 이후 사회 변혁의 열기는 거푸 찬물을 뒤집어썼다.

 

동유럽 국가들이 89년 대거 체제변환을 겪은 데 이어, 90년 서독의 동독 흡수통일, 91년 소련 몰락 등 현실 사회주의는 앞다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온갖 변혁 이론은 급속히 빛을 잃고, 실천적으로 무기력해 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론의 무주공산을 탐하고 나섰다.

 

신영복 교수는 검열 때문에 쓰지 못했던
‘학교’ (감옥) 시절 경험과 생각을 풀어내
<다시 쓰고 싶은 편지>란 제목의 책을
출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혼돈에 빠진 진보주의자들은 문득, <사색>에서 빛나는 철학의 편린을 발견했다.

 

‘실천이란 반드시 극적 구조를 갖춘 큰 규모의 일만이 아니다’(280쪽), ‘긴장과 갈등으로 팽팽히 맞선 관계는 대자적 인식의 한 조건일 뿐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관계의 실상’(286쪽ㆍ이상 증보판 기준)과 같은 문장은 전투적ㆍ단기적 실천론에 매몰된 진보 운동의 조로(早老)를 일찍부터 경계하고 있었다.

 

이로써 <사색>은 정서적 울림이 풍부한 옥중 서신에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현실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이 변증법적으로 결합된, 우리 진보주의의 새로운 지평”(김호기 연세대 교수)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저자 스스로는 <사색>을 “겹겹의 검열 때문에 못다 쓴 편지”라고 표현한다.

 

교도관 입회 하에서 필기구를 빌려서 썼고, 작성된 편지는 교도소장의 검열필 도장을 받아야 했다. 수신자인 가족들을 심려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자기 검열도 펜을 자주 멈칫거리게 했다.

 

“감옥에서 맞닥뜨린 판이한 상황과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과의 충격적 접촉 속에서 솟아나는 생각을 기록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집으로 보내는 봉함엽서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에게 편지는 가족과 소소한 안부를 주고받기 앞서, 생각을 바깥으로 나르는 매체로서의 의미가 강했다는 얘기다.

 

<사색>은 98년 8월 출판사를 돌베개로 옮겨 증보판을 펴냈다. 지금까지 43쇄 17만6,000부가 발행됐다. 증보판엔 구속 당시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이었던 저자가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남겼던 메모들이 추가됐다.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재생휴지에 항소이유서 작성용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에는 1,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젊은 진보주의자 내면의 고통이 엿보인다. <사색>에서 유명한 부분인 ‘청구회 추억’도 이 시기 29장의 휴지에 써내려간 기록이다. 출소한 지 3년쯤 지나 손용대와 연락이 닿아 한 번 만난 것이 청구회와의 마지막 인연이다.

 

89년부터 성공회대에서 정치경제학과 한국사상사를 강의하기 시작한 신영복은 96년 <나무야 나무야>(돌베개), 98년 <더불어숲>(전 2권ㆍ돌베개)을 잇달아 펴내면서 다시금 대중과의 소통에 나섰다.

 

각각 국내와 해외를 여행하며 ‘당신’에게 띄우는 서신 형식의 두 책에서 저자는 반성적인 문명 성찰과 더불어 인간-인간, 인간-자연과의 상생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2004년에 나온 <강의>에선 <주역> <논어> <노자> 등 중국 고전의 재해석을 통해 서양철학의 ‘존재론’에 대비되는 ‘관계론’의 논리를 심화시킨다.

 

<논어> 속 화이부동(和而不同)에 대한 저자의 해설을 보자. ‘화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165쪽)

 

학자이면서도 신영복은 줄곧 에세이 풍의 글쓰기를 선호해왔다. 한문뿐 아니라 우리말에 대한 깊은 조예를 보여주는 간결한 문장은, 서화가 대접을 받을 만큼 출중한 서예 및 그림과 어우러져 글쓰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올 초 출판된 <처음처럼>(랜덤하우스중앙)은 글보다 일러스트적 요소가 도드라지는 서화집이다. 그는 “러시아의 소설, 영국의 희곡, 그리스의 서사시처럼 우리의 정신을 담을 수 있는 글쓰기의 보편적 형식을 늘 고민해왔다”고 말한다. 머리 속 이론이 가슴 속 감수성에 도달할 때까지의 긴 여행(the longest journey)을 안내하는 자. 그것이 에세이스트이자 지식인으로서 그가 느끼는 사명이다.

 

 

"물은 산이 막으면 감돌아가고 깊은 웅덩이가 있으면 채우니…"

노자'물의 철학' … 그가'편안한 좌파'인 이유

 

신영복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책으로 <자본론> <노자> <논어>를 꼽는다. 언뜻 조합이 불가능해 뵈는 동서양 고전 3권을 두고 그는 "마르크스적 경제결정론에 자연 및 인간주의적 담론을 결합한 것이 내 생각의 근저"라고 설명한다. "마르크스의 상부구조인 정신문화 영역에 비중을 둔 사상"이라고 바꿔 표현한 적도 있다.

 

신영복은 소위 4ㆍ19세대다. 대학 2, 3학년에 걸친, 4ㆍ19에서 5ㆍ16까지의 1년 동안 느낀 변혁의 기운과 감동은 지금껏 그의 삶을 지탱해준 원동력이다. 그 해방 공간에서 신영복은 다른 선후배들과 더불어 마르크스, 레닌 원전을 비롯한 사회주의 이론서를 탐독했다.

 

학문적 관심도 자연히 당대를 풍미하던 케인즈 중심의 근대경제학보단 좌파적인 정치경제학에 쏠렸다. 지금도 그에게 마르크스 경제학은 "자본주의의 구조와 운동을 비판하는 관점으로 탁월한 이론"이다. 또 그는 한국 사회를 "조선 후기부터 형성된 지배 블록이 그대로 이어져 온 완고한 보수지배 구도"로 규정한다. 따라서 '87년 체제'를 집권세력 전면 교체로 과대 평가해선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변함없이 견결한 좌파인 그를, 세상이 이토록 편안히 여기는 까닭은 뭘까. 신영복은 <노자>의 '물의 철학'을 언급한다. "물은 산이 막으면 감돌아가고, 깊은 웅덩이가 있으면 채우고 간다. 유부쟁 무우(有不爭 無尤). 다투지 않으니 허물이 없는 것이다. 이를 가장 과학적 방법으로 실천하므로 오류가 없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 다른 진보적 인사들처럼 대안적 사회 모델을 앞세우지 않는 점도 그가 '편안한' 이유일 것이다. "70, 80년대 한국의 진보적 실천은 도달해야 할 이상주의 모델을 상정하고 그것을 지향하는 수순을 밟아왔다. 난 잘못됐다고 본다. 주체적 역량과 객관적 조건에 맞춰 부단히 가는 것 자체가 진보다. 여러 사람들이 걸어가고 나면 그 뒤에 길이 생긴다는 관점을 잃으면 안된다."

 

부단히 걷더라도 방향이 옳은지 따져볼 기준이 필요하다. 여기서 신영복은 <논어>를 내세운다. "<논어>는 인간관계 담론의 보고다. 인간관계야말로 진보의 지표다. 제도와 문화 또한 어떻게 해야 사람의 삶을 더 존중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 바탕에 서야 한다. 인간관계는 나아가 자연과의 소통까지 아우르는 개념이다."

 

마르크스적 문명 성찰, 물과 같은 삶의 태도, 눈을 맞추고 함께 어깨를 겯는 관계. 그가 설파하고 있는 '관계론'의 요체라 할 수 있다.
 

 

한국일보 2007-5-10  이훈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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