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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이끈 명저《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강의》에 이르기까지

신영복의 감옥 속에 들어온 현대사,
혹은 시대 뛰어넘기



윤무한(1943~)
전 강원대학교 초빙교수로 한국현대사를 강의하였다. 최근에는 1960~1970년대 사회.민중 운동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한 연구.저술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현재 본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신문기자, 전 대통령 비서실 통치사료비서관.


야적장에 방치된 돌이 주춧돌로


  옥(獄)이라는 한자는 좌우에 짐승들이 버티고서 말(言)을 감시하고 있는 형국이다. 말은 사람의 몫이요, 짐승은 소리를 낼 뿐이다. 그러니 감옥은 소리에 말이 갇힌 짐승의 땅인 셈. 그 감옥 속에서 말을 빼앗긴 채 젊은 시절을 다 보낸 신영복이 깊은 우물에서 사색의 시린 샘물을 길어올렸다.
  신영복, 그는 1968년 통일혁명당(統一革命黨)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20일을 복역했다. 1.5평의 독방, 가혹한 역사적 희생의 중압 속에서도 신영복은 인간·사회·역사에 대한 성찰을 멈추지 않았다. 그 속에서 길어올린 사색의 샘물들을 부모·형수·계수·조카들에게 봉함엽서란 두레박에 실어날랐다. 1988년 5월에 막 창간된 《평화신문》에 그 내용이 발췌되었고, 이어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하 《사색》)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때마침 민주적 정권교체에 실패해 실의·절망·분노·회한·타협이 난무하던 터라,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와 정신의 지남(指南) 같은 것이 절실했다. 그 때 신영복이 홀연 나타난 것이다. 신영복에게는 자신에게 역사적 희생을 강요했던 독재세력도 숙연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의 몸에 한국 현대의 고난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면, 그는 몸으로, 사색으로 한국 현대사의 협애한 지평을 뛰어넘고 있었다.
  신영복은 당시 우리 현대 지성사의 ‘지연된’ 희망으로 나타났다. 20년 넘게 야적장에 방치됐던 돌이 성찰과 사색이란 준엄한 정으로 자신의 모난 부분을 쳐나가 마침내 주춧돌로 쓰이게 된 것이다. 신영복 개인에게는 참혹한 세월이었을지 모르나, 역사의 신은 그를 요긴하게 쓰기 위해 그 긴 세월 그를 가두어놓았는지 모른다.
  처녀작 《사색》이 나왔을 때 이 무명의 낯선 필자에게 독자들은 고압전류에 감전되었을 때와 같은 충격을, 그리고 이윽고 감동과 위안과 격려를 받았다. 《사색》은 단번에 베스트셀러의 목록에 올랐다. 넓은 의미의 인문학적 사유를 담은 책들이 시장에서 연이어 고배를 마신 상황을 고려한다면, 참으로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20세기의 신고전’ 반열에

  그 원인이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1980년대 후반이란 이른바 보수회귀로의 그 시대에 독자들은 왜 책으로 세워진 신영복의 학교에 기꺼이 입교했을까. 꽤나 유명한 인사들이 《사색》에 심취하여 신영복을 높이 평가한 몇가지 사례만 보아도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신영복의 글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너그럽고 온화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역사와 사회와 인간이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냉철하고 준엄한 비판의 칼이 들어 있다.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삶을 배우고 또 문장의 극치에 도달한 아름다움을 배우는 것이다.(조정래)

그의 글은 인생, 사물, 우리 일상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많은 깨우침을 주기 때문에, 한번 읽고 마는 글이 아니라 항상 삶의 지침서로서 되새김하고 싶은 그런 소중한 글이다.(이해인)

봉함엽서 한 장 분량에 쏟아져 있는 글을 읽고 나면, 바로 다음 글로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밀도 있고 감동이 있는 글들이다. 어떤 때는 책장을 편 채로 가슴에 대고 멍하게 생각에 빠진 적도 있었다. 책 한권을 읽는 데 두달이나 걸렸다.(유홍준)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독서체험에 대한 고백이다. 한권의 책이 당대인들에게 이 정도의 효과를, 그것도 지속적으로 거두고 있다면, 그 책은 당연히 고전의 반열에 올라간다. 과연 《동아일보》는 창간 80주년인 지난 2005년 ‘책읽는 대한민국’ 시리즈 중 두 번째로 ‘21세기 신고전 50권’을 8월 8일부터 10월 12일 사이에 소개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출간된 책들 중 다양한 장르의 전문가가 추천한 책들에 신영복의 《사색》이 당당히 ‘신고전’으로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감옥은 최악의 경험일 것이다. 지난 군사독재 시절 대개의 양심수들은 입술이 부르트는 긴장된 투쟁의 나날 끝에 검거되었을 것이다. 그 뒤 정보기관에서 지독한 고문을 곁들인 장기간의 취조를 받는 동안 아마 극단적 갈등과 죽음 같은 모멸의 시간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때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고통과 모욕, 그리고 자신의 허약함에 대한 쓰라린 자학적 확인으로 심신이 완전한 탈진상태에 빠질 것이다. 검찰로 송치되어 마침내 구치소 한평 내외의 독방 안에 들어앉을 때부터 새로운 일상의 흐름이 생길 것이다. 독서와 명상을 통한 자기 객관화도 가능해지고 바깥과의 제한된 소통도 가능해질 것이다. 어설프게나마 노동의 일상도 가능해질 것이다. 바깥과의 격리라는 기본조건에만 괄호를 친다면 ‘가난한 안정’, 혹은 ‘안정된 가난’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안정되면 가난하지 않는 게 속세의 삶이 아닌가. 그러나 징역살이는 산중의 승려나 수도원의 수사들에게나 가능한 이런 조건을 만들어 준다.


‘나의 대학시절’ 통해 ‘밑바닥 철학’ 구축

  징역살이의 이런 특수한 환경적·정신적 조건에서 ‘징역의 철학’이 탄생할지 모르겠다. 스스로를 낮춘 가난하고 겸허한 자의 오랜 사색의 공글림에서 빚어지는 철학이다. 수행자의 철학과 많이 닮아 보이기도 하다. 신영복이 교도소에서 보낸 20년을 ‘나의 대학시절’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을까.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틔우고, 수많은 ‘하층민’들과 온몸을 부대끼면서 민중을 익히고, 게다가 양화공·봉제공·목공·영선·페인트 등의 일까지 익히고 나왔으니 ‘대학시절’이라 할만도 했다.
  《사색》을 처음 대했을 때의 관심이나 느낌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혁명적 인간’ 신영복의 면모에 강조점에 찍혔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검열을 통과해야 하는 편지글 모음이란 점에서 예상대로 그 부분은 대단히 절제되거나 은폐되어 있지만, 그 절제와 은폐 뒤에 정서적 울림이 깊게 드리워져 있음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宥和)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1983년 7월 29일)

나는 그 날 이곳의 흙 한 줌을 가지고 가서 새 교도소의 땅에 묻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으로 얼룩진 흙 한 줌을 떼어 들자, 역사의 한 조각을 손에 든 양 천근의 무게가 잠자는 나의 팔을 타고 뛰어들어 심장의 전율로 맥박칩니다.(1983년 9월 9일)

  절제된 이들 글을 통해서 느껴지는 것은 그가 한갓 ‘감옥 철학자’가 아니라 ‘혁명적 인간형’이란 것이다. 혁명가란 아파하는 사람, 증오 없이 사랑 없는 사람, 역사의 질긴 부채를 떠안은 사람이란 점에서 그렇다.

  《사색》에는 또 분노와 연민이 미덕으로 느껴지게 하는 요소가 있다.

잔디밭의 잡초를 뽑으며 아리안의 영광과 아우슈비츠를 생각한다. 잔디만 남기고 잔디 외의 풀은 싸그리 뽑으며 남아연방을 생각한다. 육군사관학교를 생각한다. 그리고 운디드니의 인디언을 생각한다. 순화교육시간에 인내훈련 대신 잡초를 뽑는다.(1984년 9월 14일)

  순화교육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수인들 옆에서 잔디밭의 잡초를 뽑으면서, 잡초처럼 역사 속에서 뽑혀져 나간 아우슈비츠의 유태인들과 남아연방의 흑인들, 운디드니의 인디언들을 생각하는, 그러면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응시하는 장면 역시 혁명적 인간의 시선과 무관할 수 없어 보인다. 《사색》이 이러한 혁명적 인간상에 대한 글모음이라는 사실을 빼버리면, 자칫 지당한 ‘공자님 말씀’ 또는 산중문답(山中問答)으로 떨어질지 모를 일이다.
  “징역살이에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가장 낮은 밑바닥에 세우는 시선과 용기가 요구”된다. 마침내 신영복은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에 대한 근원적인 공감과 연민에까지 다다랐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낮출대로 낮추어 더 낮아질 데가 없어서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의 견고한 토대를 만들어낸 것이니 ‘밑바닥 철학’이 바로 그것이다. 단지 낮은 곳의 민중에 대한 감상적 이해나 수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낮은 자리에 서서 새로운 분별지(分別智)의 근거를 마련하는 데서 이 ‘밑바닥 철학’은 깊이와 품위를 얻게 된다.


“여름징역은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

  이처럼 ‘밑바닥 철학’에 도달하는 동안 신영복은 자기 자신에게 남은 관념적 지식인의 잔재들을 하나하나 떨쳐낸다. 먼저 실천의 검증 없이 쌓여 온 관념적 지식들을 경계하고 멀리했으며,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 어떤 ‘전인적(全人的) 체득’의 길을 모색했다. 아울러 노동을 통해 ‘창백한 손’들의 한계를 물질적으로 넘어서는 ‘노동하는 인간’, 적어도 ‘노동할 수 있는 인간’으로 자신을 ‘개편’해 갔다.
  신영복의 화두는 늘 사람과 사랑이었다. 그에게 있어 사람은 출발점이고 종착점이다. 그리고 사랑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튼튼한 밧줄이다. 일상에 지치고 일상의 행복에 불감증을 앓고 있는 현대인에게는 진부한 주제일지 모르며, 배타적인 이데올로그들에게는 현실과 동떨어진 종교적 메시지로 들릴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오랜 교도소 생활이 신영복에게 가져다준 깨달음은 사람을 통해 사회를 읽는 법이었다. 사실 우리가 그 어떤 진보를 이룬다 한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과 무연(無緣)하거나 오히려 해치는 것이라면, 과연 무엇을 위한 진보인가.
  신영복은 사람을 거울로 삼는 구도자를 닮았다. 1985년 8월 28일 ‘계수씨께’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낮고도 약한 곳에서 사람을 거울로 삼는 법을 보여 주고 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 편지는 우리로 하여금 사람과 사랑에 대한 서늘한 깨우침을 준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해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도소 바깥의 사회에선 과연 증오의 원인과 대상이 제대로 파악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우리는 사회적 차원의 증오를 끌어들여 자신의 이익과 만족을 누리는 건 아닐까? 사랑마저 그런 셈법에 익숙해져 있는 건 아닐까?
숙성되지 못한 시련은 아름답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신영복의 시련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고은(高銀)이 잘 지적했다.

모진 시련은 인간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드물게는 그것은 인간을 승화시키기도 합니다. 신교수는 지난날 긴 시간의 시련을 통해서 그 자신을 어떤 증오나 착각에 파묻히게 하는 교조적 황폐화 대신 그 자신을 간단없이 단련하였습니다. 그 정신으로서의 절도는 가히 수행의 그것이었고, 고금을 오고 간 지식의 오랜 섭렵은 순결한 기도와도 방불하였습니다.(〈시인 고은이 읽은 《신영복의 엽서》〉,《중앙일보》1997년 12월 30일)

  한국인에게 지난 세월은 숨가쁘게 달려온 시간이었다. 사색이니 성찰이니 하는 말은 사치스러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쫓기듯이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꿈꾸지 못한 사색과 성찰을 바깥사람 몫까지 대신해야 했던 사람, 신영복에게는 청년시절이던 1968년부터 1988년까지의 꼭 20년의 귀양살이가 캄캄한 막장에서 빛나는 광물을 연금해내는 세월이었다.


젊은날의 아슬아슬한 임사(臨死)체험

  신영복은 1941년 경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간이학교 ‘교장’으로 의령에서 근무했을 때 교장사택에서 태어난 것이다. 1959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으며, 입학한지 꼭 1년만에 4·19를 겪었다. 5·16까지 1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신영복은 ‘푸른 하늘’을 보았다. 그것은 엄청한 감동이며 충격이었다. 《자본론》강독이 정식과목으로 개설되기도 했고, 학생들은 〈공산당선언〉 같은 문건을 번역해서 세미나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5·16이란 반동이 왔다. 4·19 이후 돋아나기 시작한 통일운동·노동운동 등 각 부분의 새싹들이 군부세력에 의해 여지없이 짓밟혔다. 장기적인 학생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신영복은 서울대 상대에 본격적인 독서 서클을 만들었다. 모택동(毛澤東)의 〈모순론〉이나 〈신민주주의론〉 같은 글을 번역해서 돌려 읽고, 고리키의 《어머니》도 깨알같이 번역해서 돌려 읽곤 했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는 주로 다른 대학이나 연합서클 지도에 주력했다. 당시 경제과 대학원에는 한 해 위에 안병직(安秉直)과 신용하(愼鏞廈)가 있어 친하게 지냈다. 대학원을 마치고 1965년 2학기와 1966년 초에 《청맥(靑脈)》이란 잡지의 예비필자 모임인 ‘새문화연구회’ 모임에 참석, 여기서 신영복은 6, 7년 선배인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의 김질락을 몇차례 만나게 되었다. 《청맥》은 통혁당 핵심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로, 반미적인 논설이 종종 실렸다. 이들 모임은 나중에 통혁당 산하의 민족해방전선으로 발표되었다.
  1968년 8월 24일 악명높았던 김형욱(金炯旭)의 중앙정보부는 이른바 통일혁명당사건을 발표했다. 북한에 연계된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지하당 조직인 통일혁명당이 적발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종태·이문규·김질락 등이 사형당했고, 신영복은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에서 모두 여섯 번이나 사형이란 무거운 꼬리표가 붙은 뒤 정상참작(?)으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통혁당에는 가입한 적도 없고, 김질락 이외에는 통혁당 지도부인 김종태나 이문규를 만난 적도 없던 신영복이었다. 그런 그가 ‘통혁당 지도간부’이며 무기수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젊은 날의 아슬아슬한 임사체험(臨死體驗)이었다.


‘걸어 나온 사색’ 《나무야 나무야》 출간

  신영복은 20년 감옥생활에서 육군교도소 시절이나 독방생활만 한 안양시절 등을 빼고는 꼬박 15년을 대전교도소에서 보냈다. 대전은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릴만큼 좌익 사상범이 많았다. 한국전쟁 당시의 부역사건으로 들어온 사람도 많았고, 빨치산 출신들도 있었다.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안내원도 있었다. 신영복은 해방 전후의 분단현실을 온몸으로 담아내고 있는 이들과 일상을 같이했다. 그러면서 체험하듯 역사를 대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생환(生還)된 역사’였다.
  감옥시절을 통해 신영복은 구혁명가들을 만나면서 “그야말로 피가 통하고 숨결이 배어 있는 역사 그 자체”를 접하게 되었으며,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과 인간적 이해와 공감”을 갖게 되었다. 한문스승이었던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과의 4년간에 걸친 ‘한 방 생활’도 그의 역사인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신영복은 1988년 8월 15일, 잡혀간지 20년만에 출옥했다. 성공회대학에서는 1989년 3월부터 그에게 강의를 맡겼다. 여기서 경제원론을 가르치는 것으로 신영복은 젊은 학생들과의 만남을 시작했다. 경제원론 이외에 ‘한국사상사’와 ‘중국고전강독’도 강의했다. 감옥에서 서구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준거를 동양고전의 지혜와 가치에서 찾고자 탐색한 것이 강의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그의 신분은 ‘비정규직’이었다. 그로부터 근 10년이 지나 사면·복권된 뒤인 1998년 5월 그는 ‘정규직’ 교수로 된다.
  “감옥 20년, 출소 후 칩거 7여년 후”인 1996년 신영복은 《사색》의 후속편으로 《나무야 나무야》를 세상에 내놓았다. ‘국토와 역사의 뒤안길에서 보내는 엽서’라고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문자 그대로 신영복이 ‘독보권(獨步權)’을 행사한 첫 여행기. 어떤 의미에서는 《사색》의 ‘실존 탐사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걸어 나온 사색’이라고나 할까?
  신영복의 사색은 책에 언급된 것처럼 “계곡을 휘돌아 흐르는 강물이 드디어 바다를 만나는 여정”과 비슷하다. 대체로 전반부에서 방문지를 통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성찰을 여러 대립적 요소와 모순의 실체를 파악함으로써 보여 준다. 그리고 후반부에 이르면 화해와 평등·겸손·자유, 그리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여정의 마지막으로 신영복은 한강·임진강·예성강이 합류하는 강화 철산리 앞바다에 선다. “더 이상 강물의 투쟁이 필요 없는” 넉넉한 바다가 펼쳐진다. 그 바다를 바라보면서 신영복은 가장 낮고, 그렇기에 가장 겸손하면서도 평화로운, 그러나 끝이 아니라 다시 물이 “하늘로 오르는 도약의 출발점”인 바다를 보여 줌으로써 새로운 삶의 지평을 제시한다. 그 새로운 지평에 서서 신영복은 “이념과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도도한 물결에 표류해 온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가 이제 그 고난의 장을 마감하고, 새 강이 합류하듯 남북한 민족이 서로 화합하여 더 이상 분열과 증오와 불신이 함께 하지 않기를 비는 간절한 소망을 담는다.


《더불어숲》은 삶과 역사 실존 탐사문

  《나무야 나무야》가 나온지 2년 뒤인 1998년, 신영복은 생애 첫 해외여행길에 올랐다. 그가 처음 여정에 오른 날은 공교롭게도 그때로부터 28년 전(1970년)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내려지던 바로 그 날이었다. 1심과 2심에서 이미 사형언도를 받았던 그로서는 생사의 갈림길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28년 후의 그 날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빠져나와 세계로 출국한 날이다. 한 날을 두고 28년의 전과 후가 이렇게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어쨌든 새로운 세기에의 길목에서 띄운 신영복의 해외엽서는 그후 《더불어숲》으로 엮어져 나왔다.
  신영복은 이 책을 통해 세계 도처를 다니면서 고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인류의 삶의 과정에서 수많은 악연들이 수많은 비극적 삶으로 이어지는 괴로움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런 연결관계 안에는 그들과 전혀 무관한 듯한 ‘나’ 자신도 들어가 있을 수 있다.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나’는 결코 ‘어떤 관계로부터도 일체 자유로운 그런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신영복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그 어떤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가? 이런 물음은 이 지구 문명의 주류에 관해 전달하고자 하는 문명비판적 메시지에 전혀 무관심하더라도, 이런 물음과는 전혀 무관하게 굴러가는 일상의 맥락 속에 뚫고 들어와 우리의 가슴을 치고도 남을 것이다.
  신영복은 분명 《더불어숲》을 쓰면서 현재의 수준으로 도달한 지구문명 전체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고대에서 후기 현대에 이르는 인간역사의 경로가 이제 이 지구가 감당할 수 없는 욕망충족의 포화국면에 도달했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그렇게 욕망해서는 끝내 삶 자체가 파탄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런 끔찍한 상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영복의 여행기, 아니 ‘인간역사에 대한 근본적 반성문’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신영복이 지금이라도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다는 ‘희망 메시지’를 그 반성문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숲》을 표제로 한 발상의 윤곽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숲을 만들려면 현재 서 있는 나무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과 관련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나아가면서 길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길을 만들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나마도 동시대의 평범한 사람들과 더불어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것이다.
  《더불어숲》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자기완성’이라는 고대적 인간주의와 ‘인간다운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근대적 인간주의를 넘어 ‘인간과 인간의 연대에 기초한 자연적 인간의 전형’이라는 ‘새로운 인간주의’다. 신영복은 모든 진리가 한 사람의 단초적 깨달음에서 여러 사람의 심오한 계몽으로 이어지는 방식을 ‘깨달음의 누증(累增)’으로 파악하고 있다. “모든 깨달음은 오늘의 깨달음 위에 다시 내일의 깨달음을 쌓아감으로써 깨달음 그 자체를 부단히 높여나가는 총체일 뿐”이라고 그는 믿는다.
  지구적 산업화, 지구적 시장화의 동력은 자본운동과 욕망충족의 기본코드로 우리의 생활문화에 거의 내장되어 있다. 이것을 극복하고 지속가능한 생존을 위해서는 ‘세기경영’의 비전이 요청된다. 지금까지의 어떤 문명적 기획보다 어려운 전(全)문명적 프로젝트는 21세기 전체를 시야에 두면서 지구적 차원의 고도 신뢰집단을 창출하는 문제이다. 여기에는 생활의 편차가 심한 지구상 각 인간집단 사이의 신뢰를 창출하는 문제가 걸려 있다. 종(種)으로서의 인간의 능력과 문명의 성패가 이렇게 총체적으로 시험대에 올랐던 일은 전례가 없었다. 신영복의 《더불어숲》은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현지 인간의 삶과 역사를 두고 다양한 사고적 실험을 통해 제시한 또 하나의 ‘실존 탐사문’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강의》-‘관계론’을 통해 동양고전 섭렵

  동양고전을 강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천년 묵은 동양사상의 진실을 오늘의 독서인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자로 된 원문을 한글로 풀어야 한다. 또 옛날의 동양이 농경사회였음에 반해 오늘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다. 다시 한번 해석과정을 거쳐야 한다. 더구나 신영복의 지적처럼 “오늘날 당면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기 위해선” 우리네 삶이 봉착한 문제들에 대한 통찰력도 겸비해야 한다. 더 나아가 신영복이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 그 대안을 모색, “일과 놀이와 학습이 함께 하는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면 실로 어려움은 겹겹이다.
  2004년 12월에 나온 신영복의 《강의》는 이런 어려움을 뚫고 있다. 옛것을 논하되 미래로 난 길을 가리키는 팽팽한 긴장이 책 전체를 관류하고 있다. 《강의》는 대표적인 유교 고전인 《시경》·《서경》·《주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논어》와 《맹자》를 거치고, 도가(道家)사상의 텍스트인 《노자》와 《장자》를 통과한다. 나아가서 《묵자》·《순자》, 그리고 법가(法家)사상들을 아우른다. 이어서 불교의 화엄학(華嚴學)을 지나 송대(宋代) 성리학의 《대학》·《중용》에까지 도달한다. 한사람이 동양사상 전반을 이렇게 널찍하게 섭렵한 경우는 좀처럼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토록 다양한 동양사상을 관통하고 있는 화살 같은 것을 신영복이 갖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서양사상의 키워드가 ‘존재론’이라면 동양사상의 핵심은 ‘관계론’이라는 것이다. 동양사상의 핵심을 ‘사람 사이에 관계를 맺고 또 잘 소통하는 것’으로 보면서, 《장자》의 “고기를 잡았거든 망태기는 버리라”(得漁忘筌)는 구절을 도리어 “고기를 버리고 그물을 만들어라”(忘魚得網)는 말로 고쳐 쓰는 데서 신영복의 관계론은 절정에 달한다. 동양사상에선 “모든 사물과 사태가 생성·변화·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데에 신영복은 방점을 찍는다.
  동양고전에서 배워야 할 미래의 가치로 신영복은 주저없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내놓는다. 이 대목에서 신영복은 오늘날 극좌와 극우는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통찰을 보여 준다. 둘다 제 주장이나 논리를 상대에게 강요하는 ‘동’(同)의 논리라는 점에서 동질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화’(和)는 나와 다른 것을 존중하고 공존하는 윤리라는 것이다. 즉 ‘화이부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和)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옥중서체는 어떻게 형성됐나

  무엇보다 《강의》의 설득력은 감옥에서 그가 체득한 ‘아름다운 관계 맺기’와 최악의 상황에서도 피워냈던 ‘희망 만들기’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가령 《주역》의 64괘(卦) 가운데 가장 힘든 상황을 나타내는 ‘산지박괘(山地剝卦)’를 두고 신영복이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이 바로 희망 만들기”라고 해설하는 대목에선 가슴뭉클한 감동을 안게 된다. 이는 신영복 자신이 오랜 ‘산지박괘’의 처지에 놓였음에도 희망의 끈을 늦추지 않았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 그런 극한체험과 실천이 없었던들 《강의》는 도덕주의·관념주의·개인주의로 주저않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신영복은 현재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다. 특히 민주화운동 관련 기념물에는 그가 도맡아 글씨를 쓰고 있다. 한동안 대박을 터뜨린 소주 ‘처음처럼’도 그의 글씨이다. 어려서 할아버지께 잠시 배우다가 잊어버렸던 붓글씨를 신영복은 옥중에서 다시 만났고, 거기에서 만당(晩堂) 성주표(成柱杓)·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신영복의 한글 글씨는 우리 서예 발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이전 한글 글씨체는 궁체가 주류를 이루었다. 정적이고 귀족적인 미학을 지닌 서체였다. 그러나 궁체는 신경림·신동엽의 시나 민요 또는 운동 현장의 뜨거운 목소리 같은 것을 담아내기엔 전혀 맞지 않았다. 신영복은 그런 내용과 형식의 문제를 두고 고심하던 중 어머니가 보내준 모필 서간체 글씨를 보며 깊이 느낀 바 있었다. 그는 이 필법을 도입하여 궁체에 대비되는 ‘민체(民體)’ 또는 ‘연대체’·‘어깨동무체’라 불리는 서체를 창안했다. 서민적 형식과 민중적 내용을 담아내는 독특한 경지를 이룬 것이다. 서예는 인간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신영복의 글씨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서체가 20년의 감옥살이와 무관할 리 없다는 데서 그의 서체를 ‘옥중서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영복 발(發)’ 민족분단·통일 대안 기대

  지난 2006년 6월 8일 성공회대학교 성당에서는 신영복교수의 고별강의가 있었다. 17년간의 성공회대학교 교수생활을 마감하면서 신영복은 이 날 《주역》의 64괘 가운데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는 ‘박괘’의 ‘석과불실(碩果不食)’을 주제로 삼았다. ‘석과’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지막으로 남은 과실을 뜻한다. 세상이 온통 악으로 넘치고 한 개의 선만 남아 있어 그 한 개마저 악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다. 신영복은 이런 상황에서 “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며,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라고 한국사회를 진단했다.
  신영복은 이 날 “WTO·IMF·FTA로 상징되는 세계화의 물결로 모든 것을 빼앗기는 위기상황이 박괘를 연상시키지만, 마지막 과실의 씨가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듯 진정한 희망찾기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거품이 걷히고 난 후의 우리 경제의 모습과 함께 우리 삶을 돌이켜 봐야 한다”며 “엄청난 외세에 떠밀리고 불의의 폭력에 가위눌리며 숨가쁘게 달려온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 봐야 한다”고 했다.
  신영복은 이날 또 박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겨울을 지나 씨앗을 뿌리고 새로운 싹과 열매를 맺는 나무처럼 사람을 키워내야 한다면서, “나무는 짧고 숲은 길다. 숲은 전체로서의 완성을 뜻하며, 나무(개인)의 결함까지도 품는다는 점에서 나무의 완성”임을 일깨웠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이 짧은 문장에서 신영복은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곧 한국 현대사 전체에 대한 근원적 반성과 새로운 지향을 암시적으로 담은 것이다.
  신영복은 “개인이 자기 인생을 살 때 그 개인의 삶 속에 그 시대가 얼마나 들어와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앞으로도 우리 시대의 요구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한 바 있다. 다만 출소 후 자신이 가진 이념적 색깔과 보수계층으로부터 공격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말과 행동을 극도로 절제해 왔다.
  이제 60대 후반의 나이로 해배(解配) 2기를 맞은 신영복, 앞으로의 20년에 대해 그는 지난 60년을 되돌아보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밝힌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신영복에게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더 필요한지 모르겠다.
  한국의 민족문제는 과거나 현재나 언제나 좌파 혹은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의 몫이었고, 신영복도 그 흐름 속에 있다. 신영복이 앞으로 자신이 감옥에 있었던 70년대 이후, 즉 자본주의 본격화 이후 한국사회의 현실과 대안을 천착하면서, 나아가서 신영복 발(發) 민족분단론과 통일론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을지 여부는 모든 지식인들의 관심사다. 분단이 가져다 준 고난을 온몸으로 안고 살았기에, 그 해법을 또한 그에게 기대하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는 법’을 삶의 모범으로 삼는 일을 사회적 차원에서도, 담론의 수준에서도 떠올리지 않고 있다. 또 보수와 진보는 ‘투쟁 패러다임’이라는 덫에 갇혀 있다. 그건 서구적 ‘적 만들기’ 게임이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고 자기를 닦기는 가을서리처럼 매섭게 하는 것은 속세를 떠난 도사의 뜬 말만은 아니다.
  나이 60이 되면 사람은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듯 우리 사회도 이제 근본구조를 성찰할 때가 아닌가 싶다. 신영복의 60대 후반에 견주어서 떠오르는 에피그램이다.
 

계간<내일을 여는 역사> 2007 봄호(제27호), 서해문집- pp. 181~200(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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