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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16-01-18
미디어 한겨레신문- 조희연

선생이 남기신 말씀 되새겨 ‘씨과실’의 싹 틔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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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신영복 교수


가신이의 발자취


 신영복 선생 영전에 드리는 글


선생님께서 인생의 마지막 여행을 떠나신 지 벌써 사흘,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지난 7일과 11일, 댁으로 문병 갔을 때만 해도 과거를 회상하며 많은 말씀을 나누었는데…, 부음을 듣고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스무 해를 감옥에서 보내셨지만, 그는 감옥 창살로 들어오는 신문지 크기만한 햇살에서도 희망을 읽고, 삶과 세상에 대해 사색하셨다. “감옥이란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은 갇혀 있지 않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공간”이라는 미셸 푸코의 통찰을, 우리는 그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며 깨달았다.


성공회대에 교수가 네댓 명뿐이던 1989년부터 선생님은 정치경제학, 사회과학 입문, 중국 고전 강독 등을 강의하셨다. 그의 강의는 성공회대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참신한 새바람을 가져왔다.


그가 성공회대에서 ‘교수축구회’를 이끌기도 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가 운동장을 누비자 가수 안치환 등 외부인 축구광들까지 몰려들어 축구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심지어 정몽준 축구협회장이 이끄는 축구회까지 원정경기를 올 정도였다.
그는 한쪽 경계 안에 머무는 데 만족하지 않는 이였다. 사람들은 장기수 출신의 그를 진보 인사로 여겼지만, 그의 메시지는 보수와 진보의 경계를 뛰어넘어 깊은 울림을 던졌다. 그에게는 제도권과 비제도권, 시민단체와 기업체를 가리지 않고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서양 사회과학과 중국 고전의 경계를 넘어섰고, 한문 대신 한글로 자신의 독특한 서체를 빚어냈다.


그가 자신의 쇠귀체로 남긴 서화는 ‘더불어 숲’ ‘처음처럼’ 등 무수히 많다. 그의 책과 말은 우리 시대의 사회, 세계, 삶에 대한 새로운 잠언록이 되었다. 그는 머리보다는 가슴이, 가슴보다는 발이 더 좋아야 한다고 믿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다시 발까지의 여행이 우리의 삶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만 못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발 좋은 사람만 못합니다.” 발이 좋은 사람이란 ‘더불어 숲’을 만들기 위해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느낀 것을 실천에 옮기는 이를 말한다.


그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이란 말씀을 자주 했다. “씨과실은 먹지 않습니다. 새로운 시작이고 희망입니다.” ‘석과불식’은 <주역>의 ‘박괘’(剝卦)에 나오는 말이다. ‘박괘’는 소인배들이 득세하여 군자들을 깎고 또 깎아내는 상황이지만, 마지막 장에 ‘석과불식’이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남아 있다. 소인배가 비록 득세하더라도 큰 과일은 먹히지 않는다. 거기에 우리 시대의 희망이 있다는 말씀이다. 씨과실이 땅에 떨어져 썩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이고 희망이다.


돌이켜보니 선생님이야말로 석과불식의 씨과실이셨다. 하필이면 한파 속에 선생님은 먼 길을 떠나셨지만, 소중한 씨과실을 남기고 가셨다. 그는 “작가는 죽지만, 독자는 늘 새롭게 탄생한다”고 했다. 신영복이 없는 시대, 우리는 그가 남긴 아포리즘과 대화하며 씨과실의 싹을 틔울 것이다. “함께 비를 맞으면서” “더불어 숲”을 이루도록.


조희연/서울시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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