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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1995-03-01
미디어 손잡고더불어-유홍준
그의 옥중서체가 형성되기까지

신영복의 서화전에 부쳐 - 유홍준

1
써 햇수로 8년이 된다.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우리 독서인들이 받은 그 신선한 감동과 감당키 어려운 충격은
금세기 어느 책도 따를 수 없는 긴 파장을 이루었다.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생의 창조적 열정이 빛나는 청춘과 원숙한 시각으로
세계를 재인식하는 중년의 나날들을 모두 거기에 가두어야 했던 힘겨운 세월이었지만,
그는 그 철저한 차단과 아픔을 깊은 달관으로 승화시켜 수정처럼 맑은 단상(斷想)들을
우리에게 선사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출간 이후 오늘날까지 숱한 찬사를 받아왔다.
정양모 신부님은 이 책이 차라리 우리시대의 축복이라고 했고,
어떤 이는 우리나라의 노신 같은 분이라고 했으며,
소설가 이호철 선생은 파스칼의 《팡세》,몽테뉴의 《수상》,
심지어는 공자의 <<논어>>에 까지 비기면서 우리나라 최고의 수상록이라고 단언하였다.
나 또한 이 책에서 받은 감동이 누구보다도 컸다.
나는 이 작은 책을 읽는데 몇 달이 걸렸는지 모른다.
하루에 내가 읽고 소화할 수 있는 편지는 서너 통 정도였다.
봉함엽서 한 장에 실린 그 짧은 글 속에는 족히 한 권 분량의 사연과 사색과 사상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 한 통의 편지를 읽은 다음에는 잠시 눈을 감은 채로 두 손에 책을 꼭 쥐고
저자가 인도하는 명사의 세계로 잠입해야 했다.
그리고는 나름대로 신영복이라는 인간상을 그려보고,
왜 그는 형님과 아우보다도 형수님과 계수씨께 보내는 편지가 많았는가,
그 분의 아버님과 어머님은 나의 부모님과 어떤 면이 같고
어떤 면이 달랐는가 따위를 일없이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그런중 그가 이처럼 명증스러운 해맑은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 타고난 문장력에 있었는가 아닌가.
아니라면 문장력이 없다고 확신하는 나도 노력하면 이런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희망이 어린 반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바로 그의 편지 중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문장력이 아니라 필재(筆才)에 관한 것이었지만 서로 통하기는 매한가지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씨란 타고나는 것이며 필재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명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필재가 있는 사람의 글씨는 대체로 그 재능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견 빼어나긴 하되 재능이 도리어 함정이 되어 손끝의 교(巧)를 벗어나기 어려운 데 비하여,
필재가 없는 사람의 글씨는 손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쓰기 때문에
그 속에 혼신의 힘과 정성이 배어 있어서 '단련의 미'가 쟁쟁히 빛나게 됩니다."

나는 그의 이 필재에 대한 단상을 통하여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고,
또 미술사에서 항시 의문으로 남겨놓았던 숙제를 풀 수도 있었다.
탄은 이정이라는 화가는 대나무 그림에서 가히 일인자였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칼에 오른팔을 맞아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그 뒤로 그림이 오히려 힘차고 기운이 생동하여
그 의사가 팔을 고치면서 '속기(俗氣)까지 고쳐주었나 보다'라는 세간의 전언과
검여 유희강이 만년에 와서 오른손이 마비되자 왼손으로 글씨를 썼는데,
그의 명작은 오히려 좌수서(左手書)에 있다고 판단되는데 이게 무슨 조화이고
무슨 아이러니인가라는 의문이었다.
내가 지금 신영복의 글씨와 그림을 논하면서 글머리에 장광설에 늘어놓은 것은
이것이 그대로 그의 작품세계 속에 녹아있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2
날이 언제인지 나는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신영복 선생의 출소와 책 출간을 기념하여 그의 글씨 전시회가 세실레스토랑에서 열렸다.
나는 비록 초대받지 못한 객이었고 그 모임에서는 아는 얼굴도 한 분도 만날 수 없었으나
그분의 글씨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첫날 기념식에 참여했었다.
그리고 그의 글만큼이나 맑고 오롯한 기품의 글씨를 열심인 관객으로 맘껏 즐겼다.
며칠 뒤 나는 당시 한국일보에 미술평을 기고하고 있었기에
그의 글씨와 최종태의 조각전을 묶어 <구도하는 마음의 예술>이라는 제목 아래 단평을 실었다.
그 글에서 나는 지금 내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신영복의 글씨에 대하여
무언가를 말하고자 함은 결코 어떤 감상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비록 그의 작가경력이 이채롭고 그의 전시방식이 본격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나의 비평적 안목에 간취된 그의 독자적인 서풍(書風)은
예술 그 자체로서 높이 평가받을 만한 것이고
본격적인 것이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영복 선생의 글씨에 대한 나의 생각과 판단은 같다.
일단 그의 한문글씨를 제외하고 한글서체로 말할 것 같으면,
신영복 선생은 전문 서예가들도 아직껏 이렇다고 제시하지 못한 한글 흘림체를
독자적인 서체로 대담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한 것이었다.
한글서예는 전통적으로 활자체·내간체, 궁서체로 내려오다가
일제시대부터 현대서예의 개념으로 탐구되어
먼저 궁체가 자리를 잡은 가운데 한글 예서체가 여러 형태로 추구되고,
일부에서 전서체와 반흘림체 등이 나오면서 제법 서체의 다양성을 확보해오고 있다.
그러나 글씨를 한자의 서체에 빗대어 고찰해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체라고 할 해서체의 다양한 개발이다.
이것이 확립되고서야 거기에서 응용된 행서와 초서,
즉 반흘림과 흘림체가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왕희지·구양순·안진경·조맹부 등의 서체가 보여주는 기본 틀걸이를
우리 한글도 확보해 가야 하는 것인데,
사실상 말이야 쉽게 할 수 있을 뿐 수많은 시행착오와 대중적 검증을 거친 서체의 등장이란
몇 세기에 하나 꼴일 수밖에 없는 어려운 과제인 것이다.
신영복 선생이 그런 가운데 행서에서 전문서예가들이 이루지 못한 어떤 예술세계를
이처럼 당당히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반갑고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영복 선생의 글씨체는 획의 굵기와 필세의 리듬에 변화가 많은 것을 특징으로 한다.
예를 들어 <길벗삼천리>라는 작품에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 긋는 획은
모두 다른 리듬과 굵기를 갖고 있다.
또 한 글자 속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낱낱 점획들이 모두 하나의 필세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그의 글씨는 힘이 강하고 움직임이 빠르게 드러나고 있다.
나는 신영복 선생의 이러한 서체는
아마도 그가 즐겨 본받았다는 송나라 미불의 글씨체를 공부함으로써 얻은 결실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미불의 글씨는 개성이 아주 강할 뿐만 아니라
주관적 감정과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에 후대의 개성파 서가들이 많이 따르곤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백하 윤순이 미불의 글씨를 본받아 크게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데,
백하의 제자인 원교 이광사는 그 미불의 글씨를 온전히 소화하지 못하여
오히려 그것을 따름으로써 손해보았다는 평을 듣곤 한다.
허기사 서예의 세계에서 미불의 글씨는
배우는 사람들이 삼가하거나 경원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미불의 글씨를 배워서 득될 것이 없다는 것이며,
그의 글씨는 개성이 강한 만큼 그 개성을 받혀주는 법도를 잃기 쉽다는 풀이도 있다.
아무튼 미불의 글씨는 개성적인 것, 현대적인 멋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매력적인 존재이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본받는 것은 금기시되는 요술덩어리 같은 것이다.
그래서 미불의 글씨를 본받는 자는
모름지기 그 개성적인 것이 들뜨지 않게 눌러주는
수련과 연찬을 다른 곳에서 반드시 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교(巧)에 빠져 방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이 미불의 글씨에서 그 점·호기의 필법과 필세와 리듬을 익혀
그것으로 독자적인 한글서체를 만들어감에 있어서
그것을 하나는 법도로 지긋이 눌러주면서 진중한 무게를 실어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주 중요하면서도 흥미로운 문제가 된다.
이 점에 대하여 나는 우선 그가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냈다는 사실이
전혀 무관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는 그 모두를 설명해 내지 못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창작자세에서 찾아보는 일일텐데.
그점에 대하여는 앞서 인용한 그의 '필체론'에서도 어느 정도 간취되지만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그가 정향 선생의 글씨에 대해 언급한 가운데서 살필 수 있다.

"정향 선생님의 행초서는 …… 아무렇게나 쓴 것같이 서투르고 어수룩하여
처음 대하는 사람들을 잠시 당황케 합니다.
그러나 이윽고 바라보면 피갈회옥(被褐懷玉) 장교어졸(藏巧於拙)
일견 어수룩한 듯하면서도 그 속에 범상치 않은 기교와 법도,
그리고 엄정한 중봉(中鋒)이 뼈대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요컨대 노자가 말한 대교약졸(大巧若拙),
큰 재주는 어리숙해 보인다는 자기 겸손과 절제의 미덕을 지키고자 함으로써
신영복 선생이 글씨가 교한 데로 흐름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창작의 자세란 어디까지나 창작자세일 따름이다.
이론과 실천이 다르듯이 창작자세가 곧 작품의 구체적인 지도 사항이 될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그는 한글글씨를 쓰면서 무엇인가를 머리속에 범본으로
삼은 다음에 필획을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눈 앞에, 최소한 그의 머리속에 어른거린 한글 글씨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신영복 선생은
그의 도록에 내 글과 함께 실릴 예술가의 자전적 고백에 해당하는 글 <서도와 나>를 쓰셨다.
나는 이 글 속에서 내가 오랫동안 품어온 그 의문을 확연히 풀 수 있었다.

…… 매우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그때 작은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어머님의 모필체의 서한이었다.
당시 칠순의 할머니였던 어머님이 붓글씨는 물론 궁서체가 아니다.
칠순의 노모가 옥중의 아들에게 보내는 서한은
설령 그 사연의 절절함이 아니라도 유다른 감개가 없을 수 없지만
나는 그 내용의 절절함이 아닌 그것의 형식,
즉 글씨의 모양에서 매우 중요한 느낌을 받게 된다.
어머님의 서한을 임서하면서 나는 고아하고 품위있는 귀족적 형식이 아닌
서민들의 정서가 담긴 소박하고 어수룩한 글씨체에 주목하게 되고 그런 형식을 지향하게 된다.

무기수 아들이 옥중에서 받는 어머님의 편지가 지니는 의미를
우리는 다는 몰라도 대략은 짐작한다.
그러나 그런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내간체가 지니고 있는 소탈한 아름다움,
마치 분청사기나 백자 달항아리 같은 아름다움을 범본으로 삼았다니
그보다 더 좋은 교본은 없었을 것이다.



4
영복 선생의 글씨체를 어떤 사람은 '연대체'라고 불렀다.
<여럿이함께>에서 보여주는 바와 강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이
모두가 뜻을 같이하여 동지애로 연대감을 북돋는 듯한 모습이라고 한다.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이다.
신영복 선생이 한글서체에서 남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던 중요한 계기는
바로 그 '연대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신영복 선생이 쓴 서예작품을 보면
그 내용이 한결같이 진보적이고 리얼리즘적이며
삶과 역사에 대한 은은한 인식을 담고 있다.
단 한번도 그는 가벼운 감상으로 흐른 일이 없다.
도덕적인 것, 교훈적인 것, 정치구호적인 것을 피하고
<녹두씨알> <흙내> <처음처럼>같은 간명하지만
폭넓은 이미지가 담긴 글귀를 찾아내어 그의 특유한 필치와 구성법으로
부기(附記)를 달고 관서(款署)를 매긴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모든 예술작품은 내용이 그 형식을 규정한다."
신영복 선생은 자신이 서예작품에서 구현하고자 한 내용이
한글의 고체나 궁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음을 느꼈다는 것은 이 점을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 내용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을 찾았고,
또 그 형식으로 하여금 내용을 받쳐내게끔 함으로써 작가적 개성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신영복의 서풍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기에 이르렀으니
논리학에서 "그렇게 이루어진 형식은 다시 다음 내용을 규정한다"는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이것을 예술의 세계에서는 일가(一家)를 이루어간다고 말한다.



5
영복 선생의 글씨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남다른 감각은 그림 같은 맛이다.
한자는 본래 서화동원(書畵同源)인지라 그림 같은 글씨, 글씨 같은 그림이 가능하지만
한글은 그저 부호의 이런저런 조합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영복 선생은 <솔아 푸르른 솔아>에서 보여주듯
그 형상성을 잡아내려고 노력하고 있고
우리는 어느 정도 그 이미지를 잡아낼 수 있다.
특히 <서울>이라는 작품에 이르면
그 절묘함이 산과 도시와 강으로 이어지는 즐거운 묵희(墨戱)·필희(筆戱)를 보게 된다.
신영복 선생이 남달리 형상성을 추구한 것은
어쩌면 그의 그림 취미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신영복 옥중엽서를 그대로 실은 《엽서》라는 책에서 무수히 볼 수 있듯이
그는 대단히 뛰어난 그림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대상을 골똘히 관찰한 묘사도 일품이지만
일종의 이야기 그림이라 할 서사적 형상들은
한 폭의 그림, 한 장의 편지, 한 권의 책으로 엮을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신영복 선생의 이러한 그림들이 우리시대의 살아있는 문인화라고 생각하고 있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보여준 문인화풍을 고답적으로 답습하는 것은 더이상 문인화라고 할 수 없다.
삼불 김원룡 선생이 보여준 그림 에세이 같은 작품이나 신영복 선생이 반추상화까지 시도하면서
추구하는 형상적 탐구야말로 전문화가가 아니지만 전문화가는 근접할 수 없는
하나의 예술세계를 잡아냈다는 점에서 '아마튜얼리즘의 승리'까지 말할 수 있는
당당한 자기 몫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6
영복 선생은 <서법과 나>라는 글에서
서예는 곧 인격과 사상을 의미한다는 서여인간불분론(書予人間不分論)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는 서구의 미학에서는 단 한번도 제기된 바 없는
동양의 독특한 예술론 내지 미학으로 그 옛날에는 당연시 했던 대원칙이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전문화·특수화·개별화·분화 현상과 함께
무너져내린 것을 반성하면서 최소한 서에만은 그것을 지켜야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나 또한 이 이론을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이는 어쩌면 필요조건에 해당되는 바 한편으로는 '프로의 미덕', 즉 장인적인 수련과
연찬 속에서 얻어낼 수 있는 득도를 존중함이 함께 따라야 할 것 같다.
선가(禪家)의 표현으로 빌리자면 분명히 남종(南宗)을 지지하지만
남종의 방만함을 방지하기 위한 북종(北宗)의 끌어들임을 희망한다.
미불의 글씨를 본받으면서 어머니의 내간체로 그 교(巧)함을 눌러주듯이.
나는 신영복 선생의 예술에서 서예가 인간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사실만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의 글씨가 일종의 옥중서체(獄中書體)라는 점이다.
조선시대 서예의 대가 중에서
원교 이광사,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이 모두 25년, 19년 9년간의 귀양살이에서
그 위대한 서체를 완성했다는 사실과 맞물려 생각하고 싶은 그 무엇이다.
한 시대를 지성으로 살다가 귀양살이나 감옥살이로
생의 창조적 열정을 잠재워야만 했던 인생들이 그 아픔의 세월 속에 자기를 절제하고
자기를 감추고 자기를 단련시키면서 그의 학문과 예술을,
마치 대합조개가 진주를 닦아내듯, 가꾸어간 결실들이 원교·다산·추사에서 얻어지듯
신영복 선생의 글과 글씨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다.
허기사 옛날이나 지금이나 위대한 예술가들은
그처럼 외롭고 열악한 삶의 조건, 예술적 환경에서 자기를 지켜왔다는 사실이
글을 쓰고있는 나 자신과 이 글을 읽고있는 여러분에게
침묵으로 말하는 것이 적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라고 논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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