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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04-07-15
미디어 새만화책

어둠 속에서 파낸 꽃


 

박건웅의 장편만화 <꽃>은 4부 1,150쪽의 5년에 걸친 忍苦(인고)의 산물이다. 심혼을 쏟아 넣은 육중한 작품이다. <꽃>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먼저 ‘꽃이란 무엇인가’라는 새삼스런 의문이다.

작가가 술회하고 있듯이, 이 작품은 언젠가 지리산에서 마주친 돌 더미와 돌 더미 주변의 노란 꽃에서 孕胎(잉태)되었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밝혀지듯 그 돌 더미는 비운의 여주인공이 묻혀 있는 무덤이다. 그 돌무덤을 만들어 준 주인공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지리산의 고개 숙인 작은 꽃에서 시작된 작가의 상상력은 암울한 현대사를 관통하는 고난의 여정으로 이어진다. <꽃>의 무대는 우리의 현대사 중에서도 가장 암울한 현장이다. 일제하의 징용, 정신대, 해방과 전쟁 그리고 지리산과 감옥 등 현대사의 복판을 향하여 거침없이 걸어 나간다.

그러나 <꽃>은 이 각박한 정치적 공간을 대단히 인간적인 서정으로 가득 채워 놓고 있다. 자기의 부주의로 선생님이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본 일제하의 겁 많은 소년에서부터 최후의 지리산과 ‘달려드는’ 감옥의 벽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인간적 진실을 통하여 삶의 역사성에 도달하려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사랑과 우정이 어떻게 꽃 피어나고, 또 어떻게 좌절해 가는가를 절절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삶 속에서 꽃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름 없는 돌무덤 앞으로 우리를 인도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시들지 않고 남는 꽃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엄숙한 질문을 던진다. 박건웅의 <꽃>은 우리들이 모르고 있었거나 애써 외면해 온 폐광의 벽면에서 파내는 그런 것이다.

이점에서 전편에 각인되고 있는 판화 기법의 강인한 선과 역동적인 구도가 힘차게 살아난다. 흔히 판화는 어둠 속에서 칼로 파내는 작업이라고 한다. 목판 조각과 목판 인쇄의 작업상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이 작품이야말로, 이를테면 어둠 속에서 파낸 것이다. 은폐와 망각의 저편 열 길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진실을 파낸 작품이다. 그런 면에서 작품의 내용과 판화 기편의 그림이 혼연일체를 이루어 내고 있다. 더구나 그림 하나 하나에 새겨 넣은 엄청난 공력은 비통한 역사를 마주하는 자의 준열한 자세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독자를 향해서도 그만한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생각했다. 본격적인 대하소설로 작품화하지 않고 어째서 만화였을까? 이 작품은 만화 형식에 담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만화에 대한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만화 독자의 호흡과 정서와는 대단히 이질적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읽어 가는 동안 작가의 고집스러운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만화의 擴張(확장)이었다. 漫畵(만화)는 글자 그대로 부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꽃>은 결코 부담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둠 속에서 칼로 파낸 아픔이다. 희망의 이야기를 예비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절망의 이야기다. 그런 세계가 만화 공간에 들어온다는 사실은 만화 공간 그 자체의 확장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확장의 의미는 대단히 다양하다. 기존의 만화 독자와 영상 세대의 독법에 대한 비판적이고 단호한 개입일 뿐만 아니라, 문자 매체 그 자체에 대한 비판과 전달 방식에 대한 작가의 고집스런 철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꽃>은 독자로 하여금 두 번 세 번 되풀이하여 읽어 가면서 스스로 상황을 재구성하게 한다. 대단히 창조적인 읽기를 요구한다. 말하자면 누워서 읽는 독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러한 창조적인 독법은 1부에서 보여주듯 일체의 대사와 지문을 생략한 채 이끌고 가는 대담한 진행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러한 시도는 문자와 언어에 갇혀 있는 독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언어는 작은 그릇이다. 더구나 언어와 문자로 구성된 개념은 근본에 있어서 우리들의 사고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는 폭력이라 할 수 있다. 대사와 지문이 제거된 무성만화는 새로운 독법에 대한 요구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언어에 갇혀 있는 우리들의 상실을 뛰어넘으려는 작가의 고집이다. 동시에 제도권 역사 인식에 갇혀 있는 진실을 파내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진실을 파내려는 의지와 관련하여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진실은 사실과 구별된다는 점이다. 진실은 사실을 토대로 하되 사실들을 재구성함으로써 창조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점을 결코 간과하는 법이 없어 보인다. 필자의 과도한 해석인지는 모르지만, <꽃>은 흑백이라는 無彩(무채) 공간을 사실성의 바탕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흑백과 채색을 적절하게 배합하고 있다. 이로써 과거와 현재, 사실과 진실, 희망과 절망의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단지 넘나드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공을 채우고 있는 애환의 절절함 하나하나에 대하여 저마다의 높이와 깊이를 부여한다. 진실의 창조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실로 5년에 걸친 긴 인고의 제작 기간이 소요된 이유를 알게 된다.

서문을 끝내면서 다시 꽃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특히 역사의 꽃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역사의 꽃은 흔히 역사서의 둘째 권에서 피어난다. 당대에는 모멸의 대상이던 것이 훗날 그 시대의 양심으로 꽃 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꽃을 단지 꽃으로 보지 않는 일이다. 꽃을 만나면 꽃 이전을 생각하는 일이다. 잎을 생각하고 뿌리를 생각하는 일이다. 아울러 꽃 이후의 열매를 생각하고 그 열매가 틔우는 싹을 생각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꽃을 발견하는 혜안을 기르는 일인지도 모른다. 박건웅의 <꽃>은 바로 이러한 생각을 안겨 준다.

다시 한 번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하여 이룩해 낸 ‘확장’에 대하여 감사드린다. 동시에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앞으로의 부단한 확장을 기대한다.


 

2004년 7월
성공회대 교수 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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