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1992-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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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한겨레신문 |
"하나되라" 저 외침이 들리지 않는가- 오월에 띄우는 통일염원
지리산의 그 혹독한 겨울과 한라산의 악몽 때문에 당신은 지금도 겨울산을 찾아가지 않으시겠지요. 그러나 5월의 산은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큰산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명산이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오월의 산은 겨울의 자취를 말끔히 씻은 산입니다. "마른 잎이 다시 살아나는" 푸른 산입니다.
작은 계곡에도 물을 머물게 하고 유록빛 잎사귀마다 바람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월의 산은 무엇보다도 찾아오는 사람들을 거두어주는 산입니다. 기름진 평야에서 쫓겨난 서러운 사람들의 상처를 따뜻이 품어주는 산입니다.
험난한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처럼 백성들의 상처를 따뜻이 품어주는 오월의 산은 역사의 곳곳에 우뚝우뚝 솟아 있습니다.
◇ ◇ ◇
"집이 헐려서 이사를 했습니다. 산 48번지 새 주소를 적어보냅니다."
아내의 편지를 보여주면서 당신은 당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산이라 하였습니다. 너른 들판 고른 땅에서 식솔을 거느리고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연약했던 사람들, 망가진 심신을 끌고 흘러든 끝동네는 분명 오늘의 산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의 주위에 이런 산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산은 산이되 오월의 산은 아닙니다. 풀도 없고 나무도 없고 한줄기 물마저 없는 산, 오로지 가파른 비탈로서만 산인 악몽 같은 겨울산입니다. 오월이 와도 다시 그 오월이 와도 헐리고 피흘리고 불타는 산입니다. 도쿄 지진으로 피흘리고, 로스엔젤레스에서 불타는 산입니다.
나라를 잃은 백성이나 나라가 갈라진 겨레가 설 곳은 어디서나 비탈입니다.
갈라진 반쪽으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경제학은 거짓입니다.
그것은 소수에게는 진실이지만 대다수에게는 거짓입니다. 소량의 진실이 들어 있지 않은 거짓은 없습니다. 그 소량의 진실이야말로 더욱 간교한 거짓입니다. 해마다 45만채의 집을 지을 수 있는 돈으로 칼을 사들이면서도 잘 살 수 있는 경제학은 없습니다.
◇ ◇ ◇
마흔여덟번째의 생일을 백두산 천지에서 맞이한 당신의 감회를 이해합니다. 금강산의 빼어난 봉우리가 당신의 등뒤에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따라간 누이동생의 가난한 옷차림을 경멸하는 당신의 글속에 들어 있는 것은 오만입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옷은 침실용이기 때문입니다. 의붓아버지가 사준 옷을 바로 그 아버지의 침실에서 벗지 않을 수 없었던 불행한 딸의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임진강 서러운 물결에 띄우는 당신의 기원은 절절합니다.그러나 분단의 아픔은 휴전선의 철조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마다 가슴에 붙이는 주민등록증에 있습니다. 무수한 현장을 에돌아가는 우리의 조심스런 발걸음에 있습니다. 통일의 염원은 백두산 천지와 금강산 비로봉에 바치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루의 아침 밥상에 있고, 매일매일의 노동에 있습니다.
◇ ◇ ◇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밥보다 절실하지 않다는 당신의 말은 옳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피를 팔아서 밥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피밥은 당신의 말처럼 다만 최후의 허기를 채워줄 뿐이기 때문입니다. 피가 곧 밥이기 때문입니다. 피를 만들기 위하여는 먼저 밥을 만들어야하고, 밥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쌀을 만들어야 합니다. 올해도 당신의 못자리에는 여러 가지 볍씨들이 섞여서 자라고 있겠지요.화성, 오대, 운봉, 대간, 통일벼, 밀양3호 ···.
다른 논들이 죄다 쓰러지는 거센 풍우에도 당신의 논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크고 작고 굵고 가는 각종의 볏대들이 서로서로 어깨동무로 버티는 당신의 튼튼한 볏논은 예술입니다. 아무리 사나운 폭풍에도 언제나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당신의 잡종 논은 이름 그대로 모든 볍씨의 통일논입니다.
오월은 모를 내는 달입니다.
언젠가 당신의 통일논에서 벼를 거두는 날, 그 쌀로 밥을 지어 배불리 먹은 다음에 금강산을 찾아가도록 합시다. 백두산과 금강산은 지리산과 한라산과는 다른 산이어야 합니다. 악몽 같은 겨울산이 아니라 청청한 오월의 산으로 남아야 합니다.
◇ ◇ ◇
오월의 산을 만나게 해준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나는 지금 당신의 해장국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가리키는 오월의 산은 푸른 산이었습니다. 일어서는 산, 달리는 산 그리고 우리를 부르는 산이었습니다.자식을 묻고 일어서는 산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여 달려가는 산이었습니다. 창공에 팔뚝을 뻗고 우리를 부르는 산이었습니다.
한겨레 신문 창간네돌 특집 92. 5.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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