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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05-04-07
미디어 내일신문

[그들의 스승, 그들의 모델]⑨ 노회찬 의원과 신영복 교수


석간내일신문 2005.4.7




“지행합일을 실천한 지식인으로 존경”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의 의원회관 사무실에 들어가면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라는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글이 걸려있다.
노 의원은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로 신영복 교수를 꼽았다. 신영복 교수는 28살이던 지난 68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20여년 투옥생활을 했던 인물로 자신이 투옥시절에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노 의원은 자신이 신영복 교수를 존경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신영복씨는 마음으로부터 모시는 스승이다. 저에게 아직 스승을 평가할 능력이 모자란다. 신 선생의 말과 글, 활동에서 저는 한 시대를 고뇌하는 실천가의 진수를 보아왔다.”
노 의원과 신영복 교수와의 인연은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 의원 부부를 맺어준 것도 신영복 교수의 글이다. 노 의원은 87년 당시 평화신문에 연재되던 신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여러 사람에게 소개했다. 그 중에는 현재의 부인도 포함됐다.
“신영복 선생의 글을 처에게 소개하면서 서로 가까워졌다. 이 글이 우리 부부가 맺어지는데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노 의원과 신영복 교수의 만남은 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노 의원은 신 교수가 석방된 다음해인 89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구속됐다.

◆4·19를 계기로 사회변혁에 투신 = 아버지가 교사였던 신 교수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학자로의 길을 걸을 뻔 하던 신 교수는 지난 68년 박정희 정권당시 대표적인 공안사건인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검거됐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일혁명당 관련자들을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규정했고, 주도자급 인사들은 대부분 사형이 집행됐다.
현역장교 신분이던 신 교수도 당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돼 무기징역으로 형이 확정됐다.
신 교수는 무기징역으로 복역하다 지난 88년 8월 20년만에 가석방됐다. 신 교수가 수감생활 당시 주위 사람들에게 편지형식으로 쓴 글은 지금도 ‘스테디셀러’로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이 책은 출간당시부터 감옥이라는 단절된 공간에서 느끼는 감정을 절제된 문장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문단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신 교수는 가석방후 성공회신학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집필과 후진양성에 전력하고 있다.
반면에 노회찬 의원은 오랜 수배생활을 거쳤지만 신 교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3년간의 수감생활을 했다.
노 의원은 이미 고1때부터 운동권적 소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중학교를 마친 그는 1년 재수 끝에 73년에 경기고에 입학했다.
조숙했던 노 의원은 고교 입학후 바로 사고를 쳤다. 노 의원은 의기투합한 같은 반 동료들과 함께 수유리 4·19묘소를 참배했다. 참배는 고교 2, 3학년 때까지 계속됐다. 이 때 노 의원과 같이 4·19묘소를 참배한 친구 중에는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인 이종걸 의원도 포함돼 있다.
노 의원은 “당시 4·19묘소참배는 이후 30년 동안 제 삶의 뿌리가 됐다”며 “이후 자생적 운동권이 됐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모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대학 2학년 때에 있었던 4·19혁명과 다음해의 5·16쿠데타가 자신이 사회변혁에 참여하고 결과적으로 감옥에 가게 된 계기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결과적으로 노 의원과 신 교수는 세대와 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4·19라는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

◆“실사구시하려는 모습에 감동” = 신 교수가 10년째 수감 중이던 78년 노 의원은 군을 제대하고 23살의 고령(?)에 고려대 정외과에 입학했다.
노 의원은 대학입학 당시부터 이미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노 의원은 대학 2학년이던 80년 서울의 봄을 끝으로 노동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노 의원은 83년부터 공식수배돼 89년 검거될 때까지 7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노 의원은 수배 중이던 87년에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을 결성했다. 감옥에 있던 91년에는 그의 동료들이 한국노동당을 결성했다.
노 의원은 92년 만기출소후 평소 존경하던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를 만나게 된다.
그는 당시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작은 행동 하나에도 깊은 생각과 사상이 배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실사구시하라는 신 선생의 가르침은 진보정당을 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날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신 교수와 노 의원의 교류는 14년째 계속되고 있다. 노 의원은 자신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신 교수를 찾아간다고 한다.
이후 노 의원은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진보정치연합을 거쳐 97년에는 민주노총, 재야단체들과 함께 국민승리21을 만들어 권영길 의원을 대선후보로 추대했다. 이것이 모태가 되어 오늘날 원내 3당인 민주노동당으로 발전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노 의원은 북한과 연계된 것으로 알려진 통혁당 사건 관련자들 존경하는 인물로 밝히는 것에 대해 부담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밝혔다.
“당시 통혁당 사건과 관련해 수백명의 무고한 대학생들이 조사를 받는 등 피해를 봤다. 이 사건도 대표적인 공안사건 중의 하나로 박정희 정권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지어서 봐야 한다.”

/윤영철 기자 ycyu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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