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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00-09-01
미디어 월간 복지동향

아픔을 나누는 삶



해외기행 때의 일입니다. 스웨덴기행을 끝내면서 복지국가 스웨덴을 한 장의 그림으로 만들어야 할 차례였습니다. 늦은 밤까지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복지선진국 스웨덴을 그림으로 그리기가 어려웠던 까닭을 지금 다시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아마 스웨덴에서 받은 나의 인상이 의외로 착잡하였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각종 복지관, 병원, 공원, 학교 등 스웨덴이 자랑하는 수준 높은 복지제도는 기초생활도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사실 부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심정은 매우 복잡한 것이었습니다. 안락한 삶이되 어딘가 노쇠하고 무기력한 삶.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내게는 참으로 망연하였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아내와의 다툼에 대하여 동료에게 이야기를 꺼내면 이야기를 채 잇기도 전에 정중하게 그 문제는 전문상담인과 상담하라고 권유하면 이야기를 잘라버립니다. 물론 전문상담자는 그의 동료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해 줄 것이 틀림없습니다. 훌륭한 시설을 갖춘 노인복지관의 할머니는 생면부지의 여행자인 나를 붙잡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노년의 생활은 무척 삭막해 보였습니다. 물론 복지관에는 상담프로그램이 실시되고 있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내 훌륭한 시설이란 무엇인가 반문해보았습니다. 오히려 편리하게 설치되어 있는 첨단시설들이 더욱 비정한 모습으로 내게 비쳐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스웨덴에서 느낀 삭막함은 사람들 사이에 아픔의 공유가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픔은 그것의 신속한 해결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아픔은 신속한 해결보다는 그 아픔의 공유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우산을 들어주는 것보다 함께 비를 맞는 것이 진정한 도움이 아닐까. 생각은 매우 착잡하였습니다.
 

아픔의 공유와 그 아픔의 치유를 위한 공동의 노력. 그러한 공동의 노력은 그 과정에서 당면의 아픔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사회적 구조를 대면하게 해준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질병을 국소적 병리현상으로 진단하고 대증요법(對症療法)으로 처치하는 의학보다는 질병을 생리현상(生理現象)으로 파악하고 인체의 생명력을 높이는 동의학(東醫學)의 사고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연복지(緣福祉) 개념을 구성하여 서구적 복지개념을 성찰하는 이론도 제시되고 있습니다만 나는 그러한 시도에서 어떤 가시적 성과를 기대하기보다는 그러한 이론적 접근이 인간관계를 주목하게 하고 사회구조의 문제를 대면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덕불고 필유인(德不孤 必有隣)은 물론 덕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적어도 50세까지 베푸는 삶을 산다면 그 이후의 삶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석이 사회구조를 반성하는 풀이로서 더욱 적절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자의 마지막 장에는 "성인은 사사로이 쌓아두지 않는다. 이미 남을 위하여 베풀었으므로 오히려 자기에게 넉넉하게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聖人不積 旣以爲人己愈有旣以爲人己有多)는 구절이 있습니다. 물론 범인에게 성인의 도리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경우의 성인은 이상적 목표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생각하면 오늘날의 복지문제는 함께 아픔을 나누지 않고 그 가진 바를 남을 위하여 베풀 수 없는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사회구조와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기초생활마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열악한 복지현실에서 사회구조의 문제나 인간관계의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접근인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모든 물질적 여유가 나누어지기는커녕 남김없이 자본화되어 치열한 자기증식(自己增殖)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비자본적 공간에 남아 있는 '김밥할머니'만이 나누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비시장적(非市場的) 공간과 비자본주의적(非資本主義的)인 관계가 도처에 건재하고 있으며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한 가능성을 키워나가는 것이 진정한 사회변화의 내용이 되고 새로운 문명적 담론으로 자리잡아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구나 우리의 삶을 성찰하면 성급한 목표달성보다는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 그 과정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스웨덴에서 느꼈던 착잡한 상념이 우리의 열악한 현실을 위로하려는 감상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월간 복지동향 권두칼럼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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