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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장벽
사상은 새들의 비행처럼 자유로운 것입니다
오늘은 독일 베를린의 한복판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엽서를 띄웁니다. 이 문은 분단독일의 상징이었던 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후 45년 동안 이 문은 문이 아니라 동서독을 갈라놓은 장벽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원하게 트인 대로를 향하여 활짝 열려 있는 문으로 자동차와 사람들의 물결이 거침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베를린에서 느끼는 첫번째 감회는, 분단 독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은 우리의 판문점과는 달리 독일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한가운데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산골짝의 판문점과 녹슨 기찻길을 먼 곳에 두고 있는 우리와는 달리 독일의 장벽은 독일인들의 가슴에서 일상의 아픔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독일의 통일은 독일인들의 가슴에서 한시도 떠날 수 없었던 절실한 과제였습니다. 이제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던 장벽을 걷어내고 독일은 명실공히 2차 세계대전을 끝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원스럽게 달리는 자동차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무겁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이제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우리들로서는 앞으로 통일 과정의 여러 과제를 독일의 경험에서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통일은 독일을 모델로 삼을 수 없다는 이곳 사람들의 이야기는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합니다. 한국이 독일 통일을 모델로 삼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로 통일 의지를 듭니다. 독일의 분단은 2차 세계대전 후 전승국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피해 의식이 독일인들의 기본 인식이었습니다. 독일에서는 통일을 독립의 의미로 읽고 있었습니다. 교류와 협력을 통한 통일 노력은 독일 민족의 영광으로 나아가려는 전통적 의지의 연장이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분단 상태로도 얼마든지 번영할 수 있고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어제와 오늘을 돌이켜보게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차이는 동서독은 통일 이전에도 그 사회의 기본 구조가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동서독 간의 동질성과 유사성입니다. 서독의 자본주의는 교육, 의료, 노동, 실업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친 높은 수준의 사회보장이 갖추어진 일종의 '사회적 시장 경제'입니다. 동독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침투할 여지가 없었던 반면에, 반대로 동독 쪽에서도 서독 자본주의에 대한 반자본주의적인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이미 사회 경제적 구조가 별로 다르지 않은 토대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이 통일의 중요한 기반이라는 사실입니다. 스펙트럼의 양극에 갈라서 있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게 합 니다.

 

독일이 통일이후에 지향하는 목표는 여러 분야에서 확인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것은 브란덴부르크문 문 가까이 있는 포츠담 플라자의 건설 현장입니다. 제국의사당(帝國議事堂)의 전면적인 보수 공사를 비롯하여 동서독에 걸친 넓은 지역에는 야심찬 건설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인포박스(Infobox)에 전시되어 있는 마스터 플랜은 참으로 거대한 규모였습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현장 역시 무수한 크레인의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벤츠, 쏘니 등 거대 초국적 자본을 비롯하여 수많은 국내외 자본들이 참여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2005년에 그 대단원을 완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 현장에서 독일 통일의 보이지 않는 힘을 확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통일 의지나 민족 정서와는 다른, 이를테면 당신의 표현처럼 통일을 이끌어낸 '물리적 동력'을 느끼게 합니다. 독일은 통일에 따른 부담을 내외에 호소하고 있지만 독일 경제는 통일을 계기로 비약의 발판을 만들어낸 것이 사실입니다. 방대한 동독의 저임금 노동력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구 동독 지역에서 추진되고 있는 활발한 건설 투자는 새로운 프론티어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합니다.
더구나 독일 국민들에게 통일 고통의 분담이라는 민족적 정서에 호소함으로써 사회 보장 축소와 임금 인하를 설득할 수 있는 근거로 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처럼 신보수주의 정책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하고 대부분의 부담을 국가 재정에 전가시킨 다음 독일 자본은 새로운 축적의 기반을 확대해가고 있습니다. 독일은 통일의 여세를 몰아 그 연장선상에서 21세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연평균 400만 이상에 달하는 실업과 경기 침체 등 독일은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침체는 통일에 따른 부담 때문이라기보다는 유럽 경제 전체가 당면하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가 원인이라는 것이 이곳 독일 경제를 보는 일반적 시 각입니다. 여기에 독일의 유럽통합(EU)에 대한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독일은 통일에 이 어 이제는 유럽통합을 주도하여 산업 구조를 새로운 체질로 전환하고 유럽 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함으로써 그들의 전통적 민족 의지를 관철해가려 하고 있습니다.

 

통일에 이어 새로운 약진을 준비하고 있는 독일의 동력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딘가 또 다른 벽을 쌓고 있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독일을 연상케 하는 우려였습니다. 분단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은 과거 프로이센 왕국의 개선문이었습니다. 이 문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벋어 있는 유서 깊은 보리수 거리와 6.17 거리는 히틀러가 나치 군대의 퍼레이드를 사열하던 거리이기도 합니다.
국민 경제라는 카테고리가 아직도 유효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냉전의 종식이 민족적 정염(情念)을 증폭시키고 있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나는 독일의 통일이 20세기를 넘어서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발상과 지향이 20세그를 반복하는 보수적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분단의 고통을 조금도 벗지 못하고 있는 우리 처지로서는 통일 독일에서 확인하는 활성과 약진은 부러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통일에 앞서 먼저 이산(離散)과 증오(憎惡)를 청산해야 할 뿐 아니라, 막대한 분단 비용을 청산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믿는 허상을 깨트리는 것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한반도의 통일이 이러한 정신적, 물질적 소모를 청산하는 것이어야 함은 물론이지만 나아가서는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20세기의 모순을 창조적인 다양성으로 지양(Aufheben)하는 어떤 모범을 만들어내는 것이 된다면 더욱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범은 21세기의 문명사적 과제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통일 독일이 지향하는 목표가 20세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도리어 민족적 정염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우려는 어쩌면 우리의 낙오감에서 비롯되는 자위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의 통일에 대하여 부여하려는 문명사적 소명도 이러한 낙오감을 달래는 가난한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다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남아 있는 '장벽'을 찾아갔습니다. 슈프레 강가에는 강을 따라 2km에 달하는 분단 시절의 장벽이 남아 있습니다. 그 장벽에는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환희를 새긴 수많은 글과 그림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글과 그림들은 지난 세월 독일인들이 치러야 했던 분단의 아픔과 희생을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장벽을 따라 걸으며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사상은 하늘을 나는 새들의 비행처럼 자유로운 것이다."
분단이란 땅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을 가르려고 하는 헛된 수고임을 깨닫게 하는 글입니다. 누군가 한글로도 적었습니다.
"우리도 하나가 되리라."

 

독일의 통일. 그것은 분명 우리가 모델로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꾸준한 교류와 협력을 통하여 먼저 민족적 신뢰를 이루어내어야 한다는 사실만은 배울 수밖에 없는 모델임에 틀림없습니다. 배울 수 없으면서도 배우지 않을 수 없는 모델. 이것이 통일독일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역설의 교훈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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