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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발길이 무겁다. 출근 전 혹은 직장 밖에서 늘 다짐하고는 하는 근무 중에 가급적 승객들에게 짜증을 내지 말자, 속으로 욕을 하지 말자, 하는 정말 어린아이같은 류의 결단 같은 걸 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런 결의 아닌 결의는 근무현장에 들어가고 10분이 안되어 짜증과 “에이 씨”를 연발하고는 나 자신을 곧 후회하지만 이내 소용이 없다. 아까 퇴근 무렵, 무인 매표기 앞에서 이미 사용한 일회용 교통카드를 들고 “다시 지하철을 타려면 어떻게 해요?” 묻는다. 이미 아침 9시부터 녹초가 되어버렸고, 주 6일 57시간의 막바지 노동을 향한 나의 육체는 나의 의지를 떠나 쉬고 싶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상냥한 웃음, 고객감동의 말투가 나온다면 아마 인간이 아니기도 했을 게다. 그렇다고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 표는 환급기에 넣고 다시 끊어야죠” 건조하지만 그렇다고 불친절한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나의 표정이었다. 마치 그것도 모르냐는 듯한 약간 무시하는 표정 말이다.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래도 그 여자 손님은 전반적인 사태를 여태 파악하지 못한 듯 다시 “그럼 무얼 먼저 해야 해요?” “그거야 손님이 먼저 표를 끊고 싶으시면 표를 먼저 끊고, 환급을 먼저 하시려면 하면 되는 거지 그것까지 제가 정해줍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여인이 놓여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반응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일하는 회현역은 지방에서 서울 구경 왔다면 들르는 곳, 세계에서 한국에 왔다하면 들르는 남대문 시장과 남산을 끼고 있다.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손님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게끔 하여 종당에는 역무원이 없는 무인지하철역을 만든다는 MB와 오세훈류의 인간만이 고안해낼 수 있는 그런 목표하에 개조된 이 환경에 낯설다. 가끔 지하철을 타거나 서울에 처음 나오면 기계 앞의 보이지 않는 장벽 앞에 어리둥절 하거나, 바보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그 사정을 알지만, 하루에 남대문 시장과 남산을 오가는 사람이 몇 명인지 알 길이 없지만, 그 사람들 중에 1/10 아니 100명 중 한 명이라도 역무원에게 일일이 물어보면서 지하철을 탄다면, 누구라도 정말 견디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평소 고급승용차를 탈 것 같은 귀티의 그 중년 여자는 일회용 표를 들고서는 기계 앞에서 쩔쩔 맨다. 나의 그 표정에 다시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다. 지하철을 타는데 역무원 한테 이런 '인간적인 무시'를 느끼면서 타야할 이유도 그 여자 승객에게는 없는 것이다. 나의 마음도 불편하여, 기계 앞에 가서 “다 쓰신 표는 재 사용이 되지 않고, 환급기에 넣어서 환급을 받으시고, 다시 끊어야 합니다.” 하며, 가는 역의 표를 끊어주고, 퇴근 시간을 맞았지만, 나의 마음은 참으로 우울하다. 아무리 공부를 한다고 해서 이렇게 양은 냄비 끓듯이 파르르 하고,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퉁퉁 말을 던지고, 하니 도대체 무엇이 되려 하는 것인가.

그러면서 문득, 요즘 사회문제가 되는 학교폭력과 내가 놓여 있는 상황이 별반 멀리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렇게 장시간의 교대제 노동, 곳곳에서 고객님으로 불러대는 통해 시민적 덕성을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 게이트나 교통카드 발매기 앞에서 기계의 수발을 드는 극단적으로 소외된 노동, 십 수 년째 사람 줄이기 식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최소인원의 근무, 하루에 수 만명이 오고가는 그런 길목에 성인군자라도 서 있게 만든다면 짜증과 사람이 지겨워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직 보호와 인간적인 관심 속에 커야 할, 이제 버들강아지 같은 잔 수염이 날락 말락 하는 아이들이, 조부모 한테 크거나, 누구네 엄마는 집나가고 아버지는 일거리를 찾아 지방을 떠돌거나, 아니면 운 좋게 중산층의 양부모 밑에서 자란다 하더라도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맞벌이 하는 그런 가족 환경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놓여 있는 상황일 듯 싶다. 학교에서는 또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해라, 줄을 서라, 교실에서는 무슨 색의 실내화를 신어야 하고, 장난치지 말아야 하며, 등수에 의해서 인생의 서열이 매겨지도록 강제하는 교육정책에 의한 그런 강퍅한 교실 질서와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위해 학원에서 수년을 고생하다 고시에 버금가는 반열이 되어버린 임용고사에 합격하여 들어온 교사들로 채워지는 학교질서 속에, 아직 사회의 물이 들기 전의 아이들 인성 안에 담겨질 것들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그 아이들의 내면에 괴물이 자라지 않는 것이 신기한 게 사실 우리 사회이다.

1997년 이후 우리 사회는 마치 인간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기라도 작정한 듯 직장, 사회, 학교 곳곳에서 ‘경쟁과 효율’이 우리 공동체가 돌파해야 하는 지상 최고의 목표로 되어 돌진하게 만들었다. 곳곳에서 수치로 줄을 세우고, 대학은 세계 몇 위안에 들기 위해, 지하철은 글로벌 교통리더라는 엉뚱한 목표들을 내 걸고 아래를 향해 닦달해왔다. 숫자로 평가할 수 없는 인간의 다양하고 깊은 내면의 가치들 까지 평가할 수 있다는 듯이 곳곳에 평가체계를 들여오고, 여기에 부응해서 전문지식으로 치장한 컨설팅회사와 여론조사, 경영평가 혹은 신용평가 회사들이 가공하여 만들어낸 허구적인 용역평가들은 마술적인 힘을 발휘하여 모두를 의미 없는 숫자의 나열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이런 엉뚱하게 미쳐돌아가는 세상에서는 배려심이나 양식, 자기 직무에 대한 책임이 있거나, 감수성이나 혹은 창의적인 사람은 도무지 견뎌낼 도리가 없게 만든다. 오로지 표준적으로 순응형 인간들만 양산할 뿐이다. 무한경쟁은 이런 표준화된 순응 모델에 얼마나 빨리 적응하는가만 가릴 뿐이다. 그 경쟁압박 속에 인간관계는 창백해지고 외로워지게 되며, 이 병적인 증상은 드디어 가장 약한 고리로부터 터지기 시작한 것이 불쌍한 아이들 세계에서 더 약한 친구에 대한 폭력이고, 내가 지하철에서 겪는 우울함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내일 출근해서 또 궁시렁 거리고, 사람에 대해 혐오를 느낄 테지만, 그보다 더 반성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 웃기는 질서의 약한 고리를 찾아내려는 열정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렇지만 산전수전 겪으면서 나름의 삶의 방향을 정하고 나아가는 나와 다른, 이 어린 아이들은 어쩔 것인가 싶다. 더불어 숲의 '선생님'들의 책임이 실로 크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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