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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도 이 자리에서 책에 관한 나의 병적인 증세를 걱정했던 적이 있었다. 이 병은 약화되지 않고 되려 심해졌다는 느낌이다. 40 중반이 넘으면 나름 산만하다 시피한 관심사들을 정리하거나, 숙성시키는 단계로 들어서기 때문에 이 고질병이 새로 도지기야 하리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는 이 병이 고쳐지는 것을 포기하고, 이미 나의 천성이 되어버린 이 습성과 함께 살아가는 방향으로 정리하는 쪽이 더 낫겠다 싶은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올해 들어 인터넷 서점에 쓴 돈이 백 만원 이쪽 저쪽에서 왔다 갔다 하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이 몇 권이었던가 보니 800여권 가까이 되어 간다. 빌린 책은 족족 복사를 하거나 제본을 해두는 습성이 있으니 그렇게 해서 생긴 책들도 여간 아니다. 형편없는 수준이긴 하지만 영어 책 읽는데 두려움이 사라짐과 함께 책을 향한 탐욕은 새로운 전성기를 가져왔다. '구글 도서검색'사이트는 이전에 불가능했던 영역의 책 탐을 건드려 놓았다. 또 여기에 더해 실용적이고 풍부한 도서관의 지원체계는 나의 손 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신기한 것들로 가득찬 벽장 문을 열게 만들었다. 하여, 금새 나의 집은 통제되지 못하는 책들로 점령되는 일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도저히 집안 꼴이 나지 않아 2, 3년 안에 손이 가지 않을 책들은 노끈으로 묶어 나의 미래 도서관이 만들어질 화천으로 옮겨놓은 책도 꽤 되는 것도 같다. 그럼에도 집에 들어와 몸 뚱아리를 뉠라거나, 밥상을 가져다 놓고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선 저쪽으로 책을 밀쳐놓고, 동선을 따라 양 갈래로 밀어놓는 거듭되는 임시방편으로 인해, 나의 집에서 책은 읽는 건 고사하고 물리적 공간 확보를 위해 밀어내야 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집에서는 절대 안 본다. 오로지 텔레비전 예약녹화 테잎으로 그동안의 화제가 되거나 관심프로그램을 나머지 숙제하듯 텔레비전을 본다.  

아침 출근이 아닌 날, 집을 나선 나의 동선은 제본소, 지하철, 도서관, 연구실이 정해진 코스고, 또 그때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는 나름의 방법들이 있다. 역으로 귀가길은 23시 20분 자리 일어나기, 0:03분 신도림에서 인천행 막차를 타고, 집에와 발을 씻은 다음, 걸레질, 혹은 설겆이를 하는 시간이 30분, 그리고 1시간은 구닥다리 복합기로 빌려온 책을 1시간 동안 복사하면서, 밀렸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는게 대충 나의 일과다.

오늘도 제본소에 들려 10만원 수표를 내고 잔돈으로 만 4천원을 거슬러 받으면서, "아주머니 덕분에 이 좋은 책들을 읽을 수 있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려니, 아! 눈물이 나는 거다. 사실 책을 한 권 제본뜨는 일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서로 신뢰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제본은 안해주는 것이 관례인데, 아주머니도 나를 위해 제본뜨는 일이 고맙다고 하신다.
“진짜 미쳤나봐. 이미 있는 책들도 지금부터 아무일 하지 않고 읽어도 다 읽지 못하는데, 아주머니 제가 정말 제 정신이 아니쥬” 도를 넘은 이런 병적인 태도는 정말 심하다 싶다. 지난번 책에 관하여 쓸 때는 그래도 나의 인생에 개입하게 될 마누라에게는 다른 분야의 책을, 또 미래의 어딘가에서 오고 있을 아이들에게는 대를 이어 책을 읽게 하겠노라는 포부라도 가져봤었지만, 이제는 내가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폐품으로 변해 버릴 이것들을 어쩌나 싶다. 미리 폐지 수집상과 연락관계를 만들어놓아야 하나?
“나도 몰라요. 정직한 단골이시고, 돈 벌게 해주어 좋긴 하지만 걱정되기는 하네, 하지만 학교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지금 모으고, 구해서 만드는 거잖아요. 나중에 화천에 가서 읽으시면 되지”

읽는 속도보다 수집의 속도가 압도적으로 크니, 책들에 대한 통제가능성은 그에 비례하여 급격하게 떨어진다. 제본했던 자료를 또 인쇄해놓기도 하고, 빌렸던 책을 또 빌리고, 예전에 샀던 책을 또 사는 경우, 이런 사례들이 서로 결합되어 새로운 유형의 실수도 일어나는 그러니까 제본했던 책을 또 빌리거나, 원서로 구해놨는데 번역본이 있거나 하는 일도 발생한다. 물론 그럴 때는 책에 목말라 하는 친구들이 항상 주변에 있는지라 인심을 쓰는 기회가 되지만, 그럴 때마다 도대체 이게 혹시 치매는 아닌가? 이 바보짓은 언제 끝나지도 않는 건가 하는 야릇한 슬픔, 걱정, 쪽팔림 같은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혹시 이런 습성이 나만 갖고 있는 '병'인가 싶어 선생님이나 주변 친구들에게 은근슬쩍 물어보기도 하였다. 다행인지 이쪽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들 대충 비슷한 경험과 습성들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고 한 숨 덜어놓기는 하지만, 정말 문제긴 하다.

정약용선생이 70 넘은 연세에도 복숭아뼈가 닳을 때까지 책을 읽으셨던 것처럼 그럴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지만, 늙어죽는 날 까지 책을 읽으면서 지내고 싶고 아마 그렇게 살게 될 거다. 일정시기마다 새로운 영역으로의 책탐의 전개는 새롭게 발전하는 나의 문제의식과 거의 일치 하는데, 아마 이 문제들이 정리될 때 까지 한 동안 주어진 방향으로 책탐은 지속될 것이다. 그렇고 보면 내 삶의 연령별 혹은 사회적인 변화 시기마다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던져주었고, 그 변화 속에서 올바른 삶이 무엇이고,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의 숙제를 해결하기 위한 책탐은 함께 가는 듯 싶다. 50대 60대에는 또 어떤 알고 싶은 영역이 나를 기다려줄지 새삼 설레기도 한다. 이런 책 탐이라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아예 낫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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