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대상 게시판

청구회추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나무야
더불어숲
강의
변방을 찾아서
처음처럼
이미지 클릭하면 저서를 보실 수 있습니다.

숲속의소리

2011.03.19 01:44

유하의 봄

댓글 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유하가 새 어린이집에 무사히 안착하는 듯 싶다. 이곳으로 옮기면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을까 걱정이었다.  
지난 해까지 1년 반을 다닌 어린이집에서 첫 한달 간은 계속 서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잠깐 의자에 앉는가 싶다가도 다시 일어나있곤 했다. 간식도 먹지 않고 선생님이 손 잡는 것도 뿌리쳤다. 그 시간을 견뎌내는 건 유하만이 아니었다. 나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린이집 주변에서 배회하기를 며칠이었다. 그러던 유하가 몸도 마음도 컸나보다. "재밌어" "오늘은 어제보다 더 재밌었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마음이 한가롭다. 올 봄 큰 숙제 하나를 마친 듯한 기분이다.

이곳은 차량을 운행하지 않는다. 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버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머님들이 아신다면 태우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아이 둘을 차례로 먹여 큰 아이 어린이집에 운전해 늦지않게 데려다줘야 한다. 자신이 등원시키겠다고 아이아빠에게 몇차례 다짐받았지만 불규칙한 생활 탓에 어린 유진이를 데리고 등,하원 시켜야 날이 많다. 따뜻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전 선생님으로부터 유하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민준이라는 친구와 둘이 손잡고 잔디밭 의자에 앉아 뛰어노는 친구들 모습을 지켜보고 있더랜다. 그 모습이 너무 이뻤다고.
"민준이가 유하를 많이 좋아하는거 같아요. 유하도 민준이가 싫지 않은가 봐요" 라는 선생님의 말에 까르르 웃었다.
그런데 요즘은 민재가 유하옆에 딱 붙어 논다고 한다. 민준이가 민재한테 밀렸단다. 민준이는 6살인데도 동생인 민재한테 밀리다니.. 그럴만도 하다. 사슴같은 눈망울에 수줍은 미소의 민준이가 나이 불문하고 다 친구먹는 민재를 당해내기 쉽지 않을거다. 어린이집 선생님들 모두 전혀 다른 성격의 유하와 민재의 조합에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라고...
오늘은 목공선생님이 삽으로 흙을 퍼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고 신이 났다.
내게 양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시범을 보여준다. 삽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발로 툭툭 밀어넣은 다음 삽을 뒤로 젖히면 흙이 퍼지고 이것을 옮길 때는 한 손을 삽의 앞쪽으로 옮겨 잡고 허리를 뒤로 조금 젖혀 수레에 담는 거란다. 리얼이다. 흙을 수레에 담는 동작에서는 흥분해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됐다.
남자 친구들 이야기만 하길래 유하에게 여자 동생들도 좀 챙겨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왜 내가 챙겨줘야 돼?"
"유하가 6살 언니고 다 동생이니까 언니가 동생들 챙겨주면 좋잖아. 서완이도 부끄러움이 많아서 같이 놀자고 말을 잘 못한대"(19명 중 여자 아이는 4명 뿐이다.)
"내가 무슨 엄마야? 챙겨주게"
......자기 놀이가 바쁜가보다.

어제 오후는 정신없이 보냈다.  
냉장고가 텅텅비어 이것저것 장을 봐 저녁 준비를 해놓고 유진이 이유식을 만들어 먹여놓고 친정 부모님께 아이들을 부탁하고 서둘러 나갔다. 어린이집 학부모 모임이었다. 밖으로 나오는데 입술이 지멋대로 삐죽거린다. 차에 올라타 씨익 웃었다, 너무 좋아서. 이 시간에 홀가분하게 나와 본 적이 언제인지! 모임을 마치고 집에 가는 엄마들 서넛을 세워 함께 저녁을 먹고도 아쉬웠지만, 아직 젖을 떼지 못한 유진이가 울지 싶었다. 일찍 퇴근한 아이아빠와 학부모 모임 이야기를 했다.
바깥놀이에서 어떤 아이들은 삽으로 지렁이를 반토막 내기도 한다. 그럼 선생님은 아무말 없이 두 손으로 지렁이를 옮겨 한쪽에 묻어주고 흙을 덮어준다. 아이들은 그 모습을 지켜본다. 아이에게 "그렇게 하면 안돼"라는 말을 궂이 하지 않는다. 말 대신 얼굴표정, 행동, 몸짓에서 아이들은 배운다.
그러나 엄마들은 너무 말이 많다. 엄마들은 아이들이 말할 기회를 자꾸 빼앗는다. 끝까지 듣지못하고 먼저 말해버린다. 아이들을 기다려주지 못해서 그 나이에 스스로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아직도 엄마들이 해주고 있다.
밥 먹여주고 물 떠다주고 옷 입혀주고 신발 신겨주고 등등..
학부모 모임이 아니라 교육이다. 자신들의 이야기라고 고개를 숙이고 희미하게 웃는다.
아직 TV를 보여주는 엄마들 손들어 보라고 해서 소심하게 손들었다.(아... 위대한 탄생 김태원은 봐야 하는데..) 이곳에서 TV를 보는 아이들의 단어는 '공격~!' '파워레인저 출동' '레이저 발사' 뭐 이런 거라고...  강한 자극과 소음, 장난감의 전자 기계음 등 아이들의 귀가 많이 손상됐다. 큰 소리, 강한 자극에만 아이들이 반응한다. 섬세하고 부드럽고 작고 귀기울여야 들리는 소리들은 아이들이 듣지 못하고 반응하지 않는다.  등등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기억나지 않지만(하루만에!) 원장님의 마무리 말씀은
"물질적으로 많이 해주려고 하지 마세요. 아이들에게 해주실 건 부모님들이 자신의 삶을 잘(!) 사시는 겁니다."
난 이곳이 너무 좋다. 매일 옷과 신발에서 모래 한 줌씩 나와 청소하고 씻기느라 애먹지만 그사이 얼굴 표정이 바뀐 유하를 보면 알 수 있다. 아이가 행복해하니 내가 참 잘했다 싶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945 [re 인석선배님이 찍은 3월모임 사진 두 장 1 그루터기 2011.03.28
2944 매운탕에게 쓰는 위문 편지 노동꾼 2011.03.26
2943 실내화 한 켤레가 5,000원 이더군요 레인메이커 2011.03.25
2942 해운님께도 죄송합니다! 1 박명아 2011.03.24
2941 혜영님! 죄송합니다. 2 박명아 2011.03.24
2940 11. 최고의 나를 꺼내라. 9 좌경숙 2011.03.24
2939 진호와 명선, 함께 여는 새 날 7 조진호 2011.03.22
2938 더불어숲 3월 모임 세부 일정 소개(수정) 2 심은희 2011.03.22
2937 더불어숲 3월모임 '333프로젝트 4대강 답사' 참여자 안내 7 그루터기 2011.03.22
2936 [re] 여러 나무님들의 성원에 힘입어 자리 모두 찼습니다. ^^ 1 그루터기 2011.03.24
2935 너무도 비과학적인 원자력 발전소의 공포스런 진실 2 장경태 2011.03.19
2934 오래 보아야 ~ 1 배기표 2011.03.24
2933 서울 찍고 인천 그리고 홀로 남는 다는 것 9 박명아 2011.03.19
2932 [re] 지금의 새내기와 30년 전의 새내기 2 장기두 2011.03.21
2931 10. 솔라리스 - 타르코프스키 5 좌경숙 2011.03.19
» 유하의 봄 4 유연아 2011.03.19
2929 장경태선생 게시글 NO.2959를 봐주시오(내용무) 2 장기두 2011.03.18
2928 답장 박명아 2011.03.17
2927 9.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2 좌경숙 2011.03.17
2926 딴 짓거리 4 박명아 2011.03.16
Board Pagination ‹ Prev 1 ...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 167 Next ›
/ 167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