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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서 계속...


그래서 나는 ‘등산(登山)’이라는 말보다는 ‘입산(入山)’이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한다. 등산에는 산을 ‘올라간다’는 의미가 강하지만, 입산에는 산 속으로 들어가 산과 하나가 된다라는 이미지가 더 부각된다. 내가 자연의 등을 타고 있다기보다는 자연의 품속으로 쑤욱 들어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는 그런 느낌이 좋다. 둘레둘레 걸으며 산새소리도 듣고 바람의 숨소리도 느끼면서 길섶에 난 작은 꽃과 솔잎의 향기를 맡으면서 걷는 산행이 훨씬 더 즐거운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나도 자연의 일원임을 인식하게 되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등산’이라는 것이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내려오는 것이 뒤따르는 행위라서, 일반적인 산행 나들이의 의미로는 더 적합할 수도 있다. 또 ‘입산’이라는 말에는 우리의 정서상 스님이 절로 가거나 도를 닦으러 들어가 버린다는 의미가 있어서, 일반적인 범부들의 산행의 의미로는 안 맞는 점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나로서는 ‘입산’이라는 말이 훨씬 더 마음에 와닿고 정신이 풍요로워진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사실 서양과 동양은 등산을 생각하는 이미지가 서로 다른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서양의 산은 육중하고 높고 날카롭다. 그래서 산은 저 멀리 떨어져있고 인간들은 산과 떨어진 평지에 따로이 존재한다. 서양의 산그림이나 엽서를 봐도 산은 늘 아득하게 높게 그려져있다. 사람과 산이 분리되어 산은 객관화되고 타자화되어, 언젠가는 한번 정복되어야 할 대상 쯤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하지만 동양의 산 그림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겸재 정선(1676∼1759)의 금강전도(金剛全圖) 같은 그림을 봐도, 45도 각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구도를 취해 산이 위압적이거나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진경산수화를 잘 보면 그림 속에는 어디엔가 사람도 있고, 노새도 있고, 냇물을 옆에 두고 보일듯 말듯 오두막이나 정자도 숨어있다. 사람과 떨어진 산이 아니라, 언제라도 가볼 수 있고,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는 산이다. 타자화된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조화되어 산과 사람이 하나로 합일되는 경지로 그려지고 있다. 오르는 산이라기보다는 들어가는 산인 것이다.

아울러 근대를 상징하는 ‘정복’의 등산 이미지보다는, 근대를 뛰어넘는 등산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보고자 했을 때는 ‘입산’이라는 용어가 더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등산이 지배와 흡수, 합병의 근대 동이불화(同而不和)의 논리라면, 입산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근대극복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등산’이라고 하는 것은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호주 대륙 등에서 지배와 착취를 일삼았던 정복과 폭력의 논리, 同의 논리와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입산’은 조화와 자유를 우선하며 대자연을 인간과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하는 和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동학사상에도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삼경사상이라는게 있는데 하늘과 사람과 만물이 동일하게 하나라는 입장은 화이부동과도 연결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입산은 이렇게 근대를 극복하는 和의 논리가 내재된 말이다.

同의 논리인 등산에서는 서둘러 올라가서 깃발을 꽂는 것만이 목표가 되겠지만, 和의 논리인 입산에서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자연과 교감하고 같이 오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것이 된다. 산은 그렇게 입산을 해야 더 즐겁고 의미 있으리라는 생각이 비단 나 혼자만의 억지는 아닐 것이다.

사실은 同이라는 것도 한풀 더 들어가 볼 필요가 있는데, 한 예로 환경운동은 근대적인 자연파괴를 반성하는 운동이니까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인데, 엄격한 의미에서 ‘환경’이라는 용어도 同의 논리이기는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환경(Environment)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을 둘러싸고(Envelop) 있는 자연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데, 이것도 인간을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휴머니즘의 논리, 同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예컨대 서구에서는 ‘똘레랑스’라는 말을 그들의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말로서 자주 사용하는데, 그것도 역사를 움직이는 우월한 서구인과 미개한 변방세계를 분리시키고, 변방을 최대한 관용하겠다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이미 관용의 주체와 객체가 명백히 나뉘어있고, 주체가 객체를 향해서 시혜적 차원에서 허용, 용서, 승인해 주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지배자의 권력을 바탕으로 한 同의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굳이 우리말로 옮긴다면 구동존이(求同尊異)가 똘레랑스와 흡사한 의미를 가진다.

환경이라는 말도 그런 똘레랑스의 차원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인식이나,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인식까지는 이르지 못한 서구식 인간중심주의에서 나온 말이다. 환경운동은 그래서 조심해서 할 필요가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땅을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지금 4대강을 망치고 땅투기를 하는 것이나, 이 나라의 통치권력이 ‘녹색성장’이니 ‘친환경’을 지겹도록 외쳐대고 있는 것도 환경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이중적인 의미, 곧 약이 될수 있는 성분과 독이 될수 있는 성분을 정확하게 가려 처방하고 있지 못한데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환경운동도 和而不同의 논리를 기반으로 해서 생명,생태운동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인간중심주의, 패권의 강요, 과학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술지향적 환경주의, 이런 것들은 올바른 생태주의도 아니고 和而不同도 아니다.

입산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감수성과 열린 마음만 가지고 가면 된다. 하지만 그 입산활동을 좀 더 풍성하게 즐겁게 의미있게 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입산을 산속으로 들어가는 행위, 산행과정에서 만나는 여러 존재들을 예민하게 느끼는 행위, 대자연과 하나가 되는 영혼의 고양이라고 생각 한다면 산행 그 자체는 이미 하나의 깨우침을 향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입산의 과정 내내 대자연의 신비와 생명의 기적을 놀랍게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입산은 마치 고행 같기도 할 것이고  영혼을 정화시키는 순례길 같기도 할 것이다.

잡다한 일상을 벗어나 순례길에 나섰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수한 만남과 인연을 예고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순례길에서 무언가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는 이제껏 익숙했던 것들이 아닌, 이제까지와는 다른 어떤 상황이나 사람과의 마주침, 의식의 각성을 통해 일상과는 다른 어떤 것을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순례는 늘 익숙하던 것과의 차이, 그 낯섦과의 대면에서 오는 신선한 충격을 통해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넓히게 된다. 그것은 순간순간 낯선 것들과의 마주침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용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산행으로 이루어지는 낯섦과의 대면을 통해 차이를 획득하는 방법으로 먼저 수직적 차이를 들 수 있다. 산행은 평소와는 다른 충분한 고도감을 통해 차이를 획득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마 정상을 정복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가장 큰 긍정성은 이런 고도감의 성취일 것이다. 정상이든 아니든 어쨌든 입산자는 평소와는 다른 높이와 각도에서 아래를 조망하게 된다. 아래는 온갖 희로애락과 흥망성쇠가 교차하는 인간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빠져나와 조그맣게 축소된 인간의 공간을 바라보노라면 그 속에서 있었던 온갖 갈등과 차이들이 그 고도감만큼 조그맣게 보일 것이다.

1969년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처음으로 달에 발을 내디딘 암스트롱이 본 지구의 모습도 그러했을지 모른다. 저 푸른 작은 행성에 수십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니.. 하는 생각을 어찌 하지 않았겠는가. 아마 그는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고도감을 획득했을 터인데, 실제로 우주를 다녀온 많은 사람들은 그 후 인간과 삶에 대한 인식이 우주적 시야에서 이루어지곤 했다는 이야기도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산행은 수직적 고도감을 통해서 낮은 데서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시각을 접할 수 있고, 또 낯설은 경험을 통해 다양성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 차이와 다양성을 받아들여 자기성찰의 기회로 잘 활용하면 스스로 변화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것이 산행의 첫 번째 묘미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수평적 차이의 획득도 있다. 입산은 올라가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충분한 거리의 이동을 통해 낯선 곳으로 옮겨 가는 여행이기도 하다. 프랑스 북부를 출발해 스페인의 산티아고까지 800킬로미터를 가로질러 가는 ‘엘 까미노 데 산티아고’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순례길의 하나다. 한달이 넘는 순례 동안 이들은 매일 처음 가보는 길을 걸어서 처음으로 가보는 숙소에서 전혀 낯선 사람들과 처음으로 만나 이야기하고 또 다음날 아침이 되면 새로운 만남을 위해 걸어간다. 순례는 나와 다른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 다른 세계관, 가치관과의 만남이며, 동시에 전혀 다른 나와의 만남이기도 하다. 매일매일의 수평적 거리의 이동만큼 나 자신이 달라지고 있음도 느낄 것이다.

특히나 미지의 길을 처음으로 걸어갈 때, 그 길이 힘든 길일수록, 평소의 익숙한 길을 걸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긴장감과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우연한 마주침과 차이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용기있게 전진해 나간다면, 미지의 길이 선사하는 전혀 다른 시각과 희열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출발할 때와 비교할 때 더 성장하고 정신이 맑아지고 영혼이 고양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순례길과 입산길의 두 번째 묘미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입산은 시간적 차이의 획득을 통해 삶을 조망하게 해 준다. 언젠가 나는 북한산을 오르다가 고개를 돌려 내려다본 계곡의 단풍 융단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나는 지금도 그곳을 지나가면 그때의 감동과 아름다움을 상기한다. 작년에 본 산과 올해 본 산이 다르고, 어제 본 산과 오늘 보는 산이 다르다. 그래서 입산은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개인적인 삶에 대한 반추, 인간사 생로병사의 의미, 생장성쇠(生長盛衰)하는 대자연의 섭리에 이르기까지, 흘러가는 시간속에서 변화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깊은 사색의 기회를 제공해준다.

그래서 입산은 과거와 현재, 미래와의 대화이기도 하다. 사실 과거라는 지나간 역사적 사실을 두고 현재와 미래는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치열한 쟁투를 벌인다. 현재나 미래나 과거의 사실을 데려와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한다. 이른바 과거를 어떻게 재해석해낼 것인가의 문제이고, 미래를 위해 어떤 길을 찾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다. 보통 현재는 보수적이기 쉽고, 미래는 진보적이기 쉬우나, 사실 절대적으로 옳은 쪽은 없다. 다만 우리는 이상과 현실에 대한 균형잡힌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입산이라는 행위는 먼저 이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 반추해보는 자리이며, 동시에 우리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를 고민해보는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두서없는 글도 하산할 때가 되었다. 나는 이 글 전체를 통해 등산(登山)이 아닌 입산(入山)에 대해 우리 모두가 생각해 보기를 원했다. 그것을 입산의 논리라고 칭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먼저 산은 정복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연속에 들어가 자연과 우리가 하나임을 느끼기 위해서 간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등산’이라는 말에는 근대의 논리가 내재해있다. 휴머니즘, 내셔널리즘, 자본주의는 모두 지배, 흡수, 합병의 同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는데, 이는 모두 근대를 떠받치는 핵심 가치들이며, 이제 거기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入山은 그것을 위한 한 방법으로 내가 제안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입산의 논리는 결국 우연하게 마주치는 낯섦들과의 대면을 통해서 차이를 인식하고, 그 차이에 기반해서 나를 변화시켜내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고도감을 통한 수직적 차이의 획득,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수평적 차이의 획득,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순례길을 통해 시간적 차이를 획득하는 것. 이 모두를 ‘입산’의 경험을 통해 체험해보기를 권한다. 혹은 여럿이 함께 하기를 기대한다.

이 모든 길에는 무수한 장애물이 버티고 있을 것이며, 하나하나의 과정이 우리를 낭떠러지로 내몰거나 길을 잃고 헤매게 만드는 모험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럿이 걸어가면 숲 사이로 길이 나는 법이다. 그 길을 끝까지 다 가고 못 가고는 그저 운명에 달린 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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