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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길어서 두번으로 나누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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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문적인 산악등반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아직 백두대간 종주도 한번 해 본적이 없는 그야말로 동네 뒷산을 주로 다니는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가끔씩 산의 냄새 속에서 자유의 향기를 맡고 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 주제넘은 짓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한 평범한 산행애호가가 산행을 하면서 느낀 생각들을 자유롭게 쓴 에세이 정도로 봐 주면 될 것 같다.

나는 산에 올라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를 좋아한다. 어떤 사람들은 산에 가면 잡생각 같은 것도 머리에서 몰아내고, 그저 한발 한발 옮기는 발걸음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도 이야기하지만, 나 같은 범인이 그런 경지까지 알 길은 없다. 그래도 이런 저런 잡생각들을 하면서 산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머리가 가뿐해지고 산을 다 내려올 때쯤이면 무언가 정리되는 듯한 경험을 할 때가 많다. 나는 그런 것이 좋아서 산에 다닌다.

그런 잡생각 속에서 가끔씩 드는 의문 중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은 왜 산을 오를까라는 것이다. 조지 맬러리라는 유명한 등반가는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지만 나로서는 그 뜻을 온전히 알 길이 없다. 오히려 주변의 범부들이 말하는 것처럼 ‘건강을 위해서’라거나 ‘맑은 공기를 쇠려고’, 혹은 ‘정상에 올라 서 보려고’ 간다는 말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다.

그러함에도 뭔가 아쉽다. 우리가 산에 오르는 이유가 그것 뿐일리는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고, 한 사람에게도 한두가지 이유가 아닌 복합적인 요인이 있을 것이다. 본인이 미처 알아채지도 못한 이유들 말이다. 맬러리가 산이 거기에 있어서 간다라고 했을 때도 산에 오르는 많은 이유들을 한마디로 설명할 길이 없기에 마치 선문답 같은 그런 말을 했으리란 짐작도 해본다.

그런데 산에 오른다는 행위에 대해 또 다른 의견을 내어 놓은 사람이 있다. 영국 출신의 저명한 등산가인 프랭크 스마이드(1900~1949)란 사람이다. 그는 그가 쓴 ≪산의 영혼≫이라는 책에서 등반의 즐거움은 산을 오르는 행위 못지않게 그 산들을 구경하는 행위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꽃과 함께 있을 때 산의 평화로움을 한껏 만끽할 수가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산에서 보낸 가장 행복한 나날들 중에는 꽃들 속에서 보낸 날이 많다. 나는 꽃들과 더불어 있을 때면 전혀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나는 어떤 조용한 곳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아무것도 없이 꽃들하고만 같이 한가하게 여러 시간을 보냈다. 그러자 나는 높다란 구름들이 밟고 지나가는 줄줄이 늘어선 수많은 산봉우리들이나 마찬가지로 절벽의 가장 작은 틈바구니에 핀 가장 작은 한 송이의 꽃도 산과 계곡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꽃이란 어찌나 소박한 것인지 지극히 미천한 사람들도 그것을 씨뿌리고 거두어들일 수가 있지만, 가장 위대한 사람들도 그것을 창조할 수가 없다.”

하나의 꽃을 보고 문득 무언가를 깨달아버린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러한 글이 나올 수가 없다. 산을 오른다는 행위에만 몰두해서, 산을 오르는 과정 과정 속에 어떠한 것들이 함께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저자가 어느 날 휴식 중에 우연히 본 꽃 하나에 등산이라는 것의 다른 의미를 깨달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등산은 단순히 그냥 등산이 아니라 자연 전체와 만나는 어떤 고귀한 행위로서 다가오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산을 오를 때 정상을 향해 기를 쓰고 올라가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얼굴에는 땀이 흥건하고 무엇이 그리 바쁜지 앞만 보고 뛰듯이 올라가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건강을 위해서일수도 있고, 정상을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갸륵한(?) 의지를 내보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에서만 산을 찾는다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듯하기도 하고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다. 이점에 대해 프랭크 스마이드는 또 이렇게 말한다.

“정상에 다다른다는 것은 등산에서 모든 것도 아니요, 모든 것을 끝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루의 무늬를 짜는 황금빛 실 한 가닥에 지나지 않는다. 산의 정상은 정복한 다른 도시를 군인이 짓밟듯 그렇게 밟아서는 안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찾아가야 한다. 산은 요새가 아니어서, 그것은 인간의 허영심이 아니라 기쁨을 위해 이루어졌다. 정상은 겸허한 사람들을 위한 왕좌이고, 하나는 유한하고 다른 하나는 무한한 존재인 대지와 하늘을 다 같이 누릴 수 있게끔 그 사이에 돌출된 부분이다.”
  
정상 정복이 산행의 목표라고 생각해 왔던 우리에게, 저자는 산이 정복의 대상도 아니고 인간들의 기록갱신이나 경쟁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산을 잘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영국의 에베레스트 원정에 세 차례나 참여했던 전문등반가가 한 말이니만큼 그의 말에는 인생을 산에 바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무게감이 실려 있다.

사실 무언가를 지배하고 정복한다는 것이 산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근대문명이라는 것이 태동한 것은 자연현상을 지배하고(과학), 오랜 세월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진화한 생활방식과 풍속을 지닌 원주민들을 지배하고 복종시킨(신대륙 발견)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나 얼마전 타개한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같은 책들을 보면, 이른바 근대성이라는 것이 나와 타자를 분리하고, 객관적으로 그것을 분석하여 나를 위해 이용하고 지배, 약탈하는 무자비한 폭력과 정복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유독 서구문명이 약탈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동양인들보다 더 사악해서였다기보다는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인도, 호주같은 ‘원주민이 사는 미개한 지역’을 그들이 총칼의 힘으로 먼저 정복했다는데 있었겠지만, 문제는 그들의 그런 오만함이 정당한 것으로 승인되어 그 후의 근대역사 전체가 피로 물들여졌다는데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같은 서구인인 프랭크 스마이드 같은 사람이 오랜 정복의 등산관념에서서 벗어나서 산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는 대자연 속에서 함께하는 것을 통해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라 하겠다.

생각해보면 근대라는 것은 지배와 흡수, 합병의 논리가 속속들이 관철되는 시대였다. 근대는 크게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지리상 발견과 과학기술의 발달을 통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이후 이러한 것들이 자양분이 되어 Humanism과 Nationalism, Capitalism이라는 3가지 기둥을 주요 동력으로 하여 근대가 움직이게 된다. 흔히 우리는 휴머니즘 하면 좋은 것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 휴머니즘 속에는 신화와 신의 세계를 벗어난 인간이 신의 역할을 대신하고 싶다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영국의 존 그레이 교수 같은 이는, 동물보다 우월한 인간이 무한히 진보할 수 있다는 환상을 휴머니즘이 조장하고 있다며 그것은 진보에 대한 기독교적 믿음의 세속 버전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휴머니즘은 인류 진보의 원동력이 되어 왔지만, 그 ‘휴먼’ 속에 서구세계 이외의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럽고,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휴머니즘은 우주와 대자연에 대한 불경을 의미하는 인간의 오만과 폭력성이 그대로 내재된 채로 근대를 관통하게 된 것이다.

Nationalism이라는 것은 더 한심스러운 것이었다.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이 발흥한 것은 근대 국민국가의 탄생과 동일한 궤적을 그려왔는데, 그 내용은 국민국가라는 허구의 공동체를 마치 실존하는 것인 양 민중들을 현혹하여 지배집단의 권력과 통치체제를 유지하는데 이용해 왔다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내셔널리즘은 국가와 국민을 소수 지배집단의 권력을 위해 이용하는 국가주의, 국민주의라는 의미와 함께, 그 극단적인 형태로 인종주의(Racism)나 쇼비니즘(Chauvinism)의 형태로 발현되면 히틀러의 파시즘과 같은 재앙을 몰고 오기도 했다.

좀 더 세밀히 구별해야 할 것은 ‘민족주의’라 불리우는 것인데, 여기에는 ‘바람직한 민족주의’와 ‘나쁜 민족주의’가 있다. 나쁜 민족주의란 민족적 순수성과 단일성을 이유로 타자를 배제하고 침략하는 주의로서, 근대국가가 유지되는 데에서 지배권력은 이 ‘나쁜 민족주의’를 적절하게 활용하곤 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바람직한 민족주의’는 ‘나쁜 민족주의’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것으로서, 나로서는 'Nationismus' 차원의 고전적, 방어적 민족주의도 크게는 이 '바람직한 민족주의'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진정으로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은 지역의 자급을 통해 건강한 민중의 삶과 향토애를 복원시키는 ‘바람직한 민족주의’로서, 그것은 탐욕과 폭력으로 얼룩진 Nationalism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오늘날 한-EU FTA나 한미 FTA를 거부하는 것도, 지배와 합병의 대기업-자본-국가의 논리, 근대의 논리를 지배권력이 아닌 민중의 입장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는 잉여이윤의 무한한 축적을 통해 성장해 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태어났다는 점에서 지배와 합병의 근대논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마지막 버전이라 할 수 있는 금융자본의 위기는 지배와 합병의 논리가 봉착되었을 때 우리가 맞닥뜨릴 아비규환의 세상을 이미 보여준 바 있고, 이산화탄소의 대량 분출과 에너지고갈, 무지막지한 벌목과 물 오염, 식량부족사태가 보여주는 생태위기 또한 자본주의라는 약탈적이고 폭력적인 체제가 세상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는 결과인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근대의 논리가 맨 먼저 겨냥하고 있고, 또한 그 결과로 가장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이런 위기를 발생시킨 대자본과 권력이 아니라 가장 힘없는 변방의 민중들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지배와 합병의 근대논리, 폭력과 탐욕의 논리를 깨부수는 과제는 민중이 중심이 되어 여럿이 함께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등산’의 이미지를 ‘산 정상을 정복한다’는 메타포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근대의 지배, 합병의 논리에 침윤된 우리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상호부조를 통한 공존의 논리보다는 경쟁과 배제, 소유의 논리가 우선하고, 대자연은 인간의 발 아래에 정복되어야만 하는 대상이라는 식의 인식방법은 근대 이전의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무례한 상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날 등산의 의미는 속물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쾌감의 배설 정도로 이해되고 만 것이다. 세계적인 고봉들의 정상에까지 국가주의의 상징인 국기들이 휘날리고 있는 상황도 이러한 근대의 논리가 횡행하는 인간사회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프랭크 스마이드가 느낀 등산 본연의 의미,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즐거움을 등산에서 맛볼 수 있다. 이성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더라도 회색빛 도시의 긴장된 환경으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탈출하여 자유로운 사고와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아울러 막 봄을 지나온 이맘때 쯤 온 산을 연둣빛으로 물들이는 푸른 잎사귀들과 혹은 가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쇠락의 표시로 하늘거리는 노오란 이파리들을 보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감동을 우리에게 선사해준다. 그저 서둘러 올라갈 게 아니라 숲에서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그 나뭇잎 위를 바스락거리며 옮겨다니는 청설모의 유연하고도 긴 꼬리, 그 청설모가 먹다 놓친 잣이나 도토리 열매, 느닷없이 바로 앞에서 후드득 소리를 내며 날개치는 산꿩의 맵시를 바라보고, 음미하고, 잠시 눈길을 보내는 것은 등산의 본질적인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에게 가르쳐준다.

길섶에 난 노란색 망태버섯 하나를 우연히 발견하였을 때와 계절이 지남에 따라 꽃잎과 열매의 색상이 희게, 붉게 또 보석이 박힌 브로치처럼 변해가는 누리장나무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신이 만들어놓은 기적의 충만함과 아름다움을 맛본다. 마치 나의 의식, 그러니까 영혼의 본질 바로 그것이 팽창하여 대자연과 결합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등산(登山)’이라는 말보다는 ..... (2)에서 ㄱㅖ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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