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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범이가 22일 토요일에 이라크로 떠났다고 한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범이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 낮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눈과 비가 내렸다.
일을 하고 있는 시간만큼만 기범이 생각을 잊을 수 있다.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한달쯤 전에 인간방패가 되어 전쟁을 막겠다며 이라크로 떠난 '평화 지킴이' 소식을
오마이뉴스에서 읽었을 때, 순간 나도 그곳에 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들.

'어쩌면 세계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라크로 몰려오고
국제 여론이 미국에게 점점 불리해져서 전쟁이 안 일어날지도 몰라.
그럼 내 일생에 그만큼 보람있는 일은 없겠지. 죽지 않고 전쟁도 막고.
그래, 좀 유명해지는 불편함쯤이야 감수할 수 있지.
하지만 그런 희망이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부시와 미국이 금방 망하지 않고서야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곳에 갈 때는 목숨을 내놓고 가야 한다!'

만약 떠난다면, 유언장을 써야겠지. 유언장이라니,
몇 년 전부터 해마다 12월이 되면 유언장을 새로 써 둔다는 숲이되어 님이 생각났다.
죽음이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니까.
나도 유언장 한 번 써 놓아야지 생각만 했는데.......

무엇을 어떻게 처리할까. 영혼이 맑은 혜숙이 언니에게 모든 뒤처리를 맡길까.
아니, 괜히 짐만 되겠다. 아무래도 식구 중에 맡기는 게 낫겠지.
요셉 오라버니나 해강이 엄마에게 시킬까. 아니다. 그들은 너무 멀리 있다.
나 죽은 뒤 뒤처리하러 여기까지 오게 하기 미안하다. 내가 다 처리해 놓고 떠나야겠다.
아, 그런데 당장 다음 달까지 처리해야 하는 일부터
길게는 올해 내내 그리고 내년에도 하기로 미리 약속해 놓은 일들은 어떻게 하나.
그러고 보니 어머니 칠순이 얼마 안 남았다.
진짜 떠난다면 엄마에게는 차라리 말하지 않고 떠나는 게 좋겠다. 그렇다 해도 내가 죽고 나면 어차피 알 텐데... 그땐 어떻게 하나. 아...무슨 날벼락인가. 엄마한테는...

하지만 ㅇㅇㅇ 선생님께는 말씀을 드리고 떠나야겠지.
선생님께 내가 말씀드리러 갈 것을 상상하자마자 눈물이 쏟아진다.
아.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나는 절대로 선생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된다.
무슨 명분으로도 그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선생님이 얼마나 놀라실까?
언제나 자기 목숨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며
이런 건 먹지 마세요. 이런 게 몸에 좋은 거예요. 하나하나 일러 주시던 선생님에게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안 되겠다. 이라크로 떠나는 일 같은 건 하면 안 되겠다.
나는 거기서 이라크로 떠날까 하던 막연한 감상을 바로 접어버렸다.

그리고 지난 주 월요일에 ㅇㅇ 홈페이지에서 기범이가 올린 글을 읽었다.
이라크로 떠난 평화지킴이 2기에 자기 대학 후배가 있다 했다.
자기에게 얼마 전까지도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아이가 말도 없이 떠난 걸 다른 후배에게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주가 다 가기 전에 기범이는 떠났다.  

아, 기범이는 도대체 그토록 사랑하는 엄마를 두고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를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기르던 강아지가 죽자 사흘 나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울기만 하던 아이가,
그 강아지 묻어주고 팔이 하나 떨어져 나간 것처럼 아파하던 아이가...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더니,
기범이는 한없이 여리고 착하기만 해서 나를 늘 부끄럽게 만들더니
이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르기까지 한다.

몇 년 전 겨울,  세상에 오직 혼자인 것 같은 날, 그런 날이 있었다.
나는 몹시 침울해져서 기범이에게 전화를 했다.
언제나처럼 기범이를 놀려먹다가 내가 그랬다.
"너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나를 버린다고 해도 내 편이 되어 줄 거지?"
"어떻게 알았어요. 누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핀잔 주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듯 따뜻하게 말해 주던 아이.
기범이는 늘 그렇게 약한 것, 못난 것의 편이었다.

이제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도를 시작해야겠다.
그의 말처럼 저절로 갔듯 저절로 돌아오기를.
그래서 그동안 걱정과 불안으로 잠을 잘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기쁨을 돌려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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