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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들어 사는 인생
형수님께


지난번 형수님께서 접견 오시던 날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재소자 접견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을 때 몹시 침울한 표정으로 접견실을 나와 제 옆자리에 맥놓고 앉는 젊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초면이지만 저는 그를 위로할 작정으로 몇 마디 말을 걸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제가 할 수 있는 위로란 적당한 말끝에 내가 십수년을 살았다는 사실을 소개하는 것이 고작인데 대부분의 단기수들은 십수년의 옥살이에 대하여 놀라는 마음이 되고 그 긴 세월과 자기의 얼마 안되는 형기를 비교해보고 거기서 약간의 위로를 얻습니다. 세상에는 남의 행복과 비교해서 느끼는 불행이 있는가 하면 남의 불행과 비교해서 얻는 작은 위로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제가 그를 위로하기 전에 제 쪽에서 먼저 충격을 받고 생각이 외곬에 못박혀버렸습니다. 그와 나누었던 대화는 다음과 같이 매우 짧은 몇 마디였습니다.
고생이 많습니다. 누가 오셨어요?
……제 처가 왔어요…….
무슨 안 좋은 이야기라도 들었습니까?
……일 나가나 봐요. 말은 않지만…….
그야 먹고 살자면 일 나가야지요.
그런 일이 아녜요.
…….
가버릴 것 같아서 그래요.
형수님은 아마 이 대화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가 의미하는 '일 나간다'는 말은 한마디로 '몸을 판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생면부지인 제게 제 아내의 일을, 그도 자랑이 될 수 없는 일을 서슴없이 이야기해준 것이 아무래도 잘 납득되지 않습니다만 추측컨대 아마 자기의 근심에 너무 골똘한 나머지 다른 것은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수도 있고, 또 같은 재소자라는 동료의식이 그렇게 하였을 수도 있고, 그리고 '일 나가는 여자'가 그에게 있어서 특별히 수치스럽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받은 충격은 이 세번째의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몸을 팔아 살아가는 여자를 부정(不貞)한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 설사 부정한 여자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를 자기의 아내의 자리에 앉히기를 조금도 꺼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저로서는, 알고 있는 일이긴 하나 정작 부딪치고 보면 상당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내의 정절에 대한 세상의 모든 남편들의 당연한 요구가 그의 삶에 있어서는 얼마나 고급한 것인가를 일깨워줍니다.
사실은 그 젊은 친구뿐만 아니라 우리의 벽촌에는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부일처제는 그들이 향유하기에는 너무나 고급한 제도입니다. 그들은 일부반처(一夫半妻), 일부1/3처……, 일부1/10처……, 그리고 여자 쪽에서 보면 일처반부(一妻半夫), 일처1/3부……, 일처1/10부……라는 왜소하고 영락된 삶의 형식을 가까스로 꾸려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옹근 한 여자를 데불고 살 처지가 못되는 지아비들이며, 아내의 자리 하나 온전히 차지할 수 없는 지어미들입니다.
이를테면 창녀와 그의 '가난한 단골'과의 관계가 곧 일부1/10처, 또는 일처1/10부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일부일처제의 가정을 꾸릴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의 소외된 결혼형태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서울의 외곽에 빈촌(貧村)이 있듯이 일부일처제의 외곽에 있는 빈혼(貧婚), 즉 빈남빈녀(貧男貧女)들의 군혼(群婚)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도덕의 문란이 만들어낸 윤리적인 차원의 문제로 파악하는 태도는 본말(本末)을 전도한 피상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의 집 방 한 칸을 얻어 세들어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는 이처럼 아내를 또는 남편을 세들어 사는 그런 삶도 없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의 세상에 인생을 세들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아내나 남편을 세들어 사는 사람들보다 더욱 불행합니다. 징역 사는 사람들 중에는, 징역 산 햇수가, 물론 여러 번에 나누어 산 것이지만, 도합 10년이 넘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저도 그중의 하나이지만, 어린 시절을 제하고 나면 징역 산 햇수가 사회에서 산 햇수와 맞먹거나 그 이상입니다. 이들에게는 사회가 오히려 타향이고 객지입니다. 이러한 인생이 이른바 남의 세상에 세들어 사는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가(貰家), 세부(貰夫), 세처(貰妻), 세생(貰生)……. 이는 삶의 가장 참혹한 형태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들로 하여금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처럼 참혹한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러한 사람들의 삶이 그 비극적 흔적을 좀체로 표면에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아마 그 한복판에 있는 저의 감성이 무디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그들 자신의 그 왜소한 삶에 기울이는 그들 나름의 노고와 진실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온몸으로 살아가는 삶은 비록 도덕적으로 타락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진실성을 훼손하지는 못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날 접견장에서 만난 젊은 친구의 표정에서 제가 읽은 것만 하더라도 그것은 아내의 옥바라지를 염두에 둔 타산의 흔적이 아니라 비록 1/3, 1/10의 아내이지만 아내의 옹근 자리 하나 고스란히 남겨두려는 그의 고뇌와 진실이었습니다. 지금도 고뇌에 찬 그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에 사무치는 생각은, 같은 시대 같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판이한 사고와 윤리관을 갖게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것은 또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하는 몸서리입니다. 그리고 그들에 비하면 저의 윤리의식은 얼마나 공허하며 사치스러운 것인가 하는 참괴의 염(念)입니다. 그리고 1/3의 아내로서든, 1/10의 아내로서든 그가 출소할 때까지 그의 옆에 남아 있어 주기를 바라는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

 

 

1985.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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