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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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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면 찾아오는 감기
계수님께


방충망 떼어내고 나니 창 밖에 가을 하늘 청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가을을 가을로 보지 못하고 가을 뒤에 숨은 겨울을 먼저 봅니다. 조적(組積)공장 처마에는 깬 지 며칠 안되는 제비새끼가 있습니다. 이제 곧 겨울인데 아직 날지도 못하고 어미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있습니다. 언제 커서 어미 따라 강남까지 날아갈 수 있을지. 그 넓은 바다 쉬지 않고 건널 수 있을지.
환절기에는 거의 빠짐없이 감기 한 차례씩 겪습니다. 감기는 물론 걸리지 않는 편이 좋지만 걸리더라도 별 대수로울 것이 없습니다. 빤히 아는 상대를 만난 듯 며칠짜리의 어떤 증세를 가진 것인지 대강 짐작이 가기 때문입니다. 그때뿐이고 속만 긁는 감기약 먹는 법 없습니다.
신열과 몇 가지의 증세, 그리고 심한 피로감까지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 잔 먹은 주기(酒氣)를 느끼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아직 그런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감기가 허락하는 며칠간의 게으름만은 무척 흐뭇하게 생각합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는 배짱으로 책은 물론 자잘한 일상적 규칙이나 이목들도 몰라라 하고 편한 생각들로만 빈둥거리는 며칠간의 게으름은 여간 흐뭇한 것이 아닙니다.
징역살이에는 몸 아플 때가 제일 서럽다고 하지만 내 경우에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감기 핑계로 누리는 게으름은 도리어 징역 속의 긴장감을 상당히 느꾸어줍니다. 특히 회복기의 얼마 동안은 몸 구석구석에 고였던 나른한 피로감 대신 생동하는 활력이 차오르면서 머리 속이 한없이 맑은 정신 상태가 됩니다. 이 명쾌한 정신 상태는 그동안의 방종을 갚고도 남을 사색과 통찰과 정돈을 가능케 해줍니다.
환절기의 감기는 편한 잠자리의 숙면처럼 그 자체가 깨끗한 휴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아침, 또 하나의 출발을 약속합니다. 이번 가을 아직 감기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만반의(?) 아플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계수님을 비롯해서 화, 민, 두용 꼬마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큼직한 열매들을 거두기 바랍니다.

 

1987.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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