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땜통 미싱사
계수님께


12월 중순 날씨치고는 왠 덤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계속 포근한 날씨입니다. 성질 괴팍한 사람의 친절처럼 언제 본색이 드러날지 적이 불안합니다만 추울 때 춥더라도 우선은 징역 살기에 쉽고 편리한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나는 전주에 온 후 서화반에서 줄곧 사방(舍房)생활을 해오다가 지난 달 중순부터는 소속 공장인 제6공장에 출역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해보는 공장생활입니다. 사람도 새롭고, 일도 새롭고, 한마디로 생활 공간이 넓어지고 활발해진 셈입니다.
우리 공장은 오버로크, 인터로크, 2본침(本針), 단추구멍 뚫는 미싱, 단추 다는 미싱 등 특수미싱을 비롯해서 모두 44대의 고속(高速)미싱이 설치된 100여 평, 110여 명의 봉재공장입니다. 사회에서 주문받은 단체복이나 보세가공품 등을 만들기도 하고 전국 교도소의 남녀 재소자 및 감호자의 피복을 만들기도 합니다. 2열로 길게 늘어선 미싱에는 각각 모터가 부착되어 있어서 페달을 밟으면 무슨 비행음 같은 소리를 냅니다.
요즈음은 재소자 피복일이 밀려서 저녁 9시까지 잔업입니다. 미싱소리, 바쁜 일손, 쌓인 일감들로 해서 공장분위기가 매우 분주합니다. 나도 출역하자 2∼3일 손 풀고는 곧 일 거들고 있는데 소위 '땜통 미싱사'입니다. 땜통 미싱사란 미싱사를 교대해주고 환자가 생기거나 종교집회 참석 등으로 미싱사가 비게 되면 그 빈자리를 때우는 '스페어 미싱사'입니다.
그러나 40명이 남는 잔업만은 거르는 일 없이 단골로 남아 오랜 작업에 지친 미싱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 숙련 미싱사가 못되는데다 땜통 미싱사는 이 미싱 저 미싱을 바꿔가며 타기 때문에 미싱의 쿠세[癖]에도 익숙치 못하고 또 그때마다 다른 재봉선을 박기 때문에 흐름 작업의 속도를 겨우 따라가는 형편입니다.
두 줄로 길게 늘어선 미싱대의 한 자리를 차고 앉아서 정신 없이 미싱을 밟다보면 마치 평화시장의 피복공장에 앉아 있는 듯한 연대감이 가슴 뿌듯하게 합니다. 작업이 종료되면 잔업식(殘業食)으로 나오는 뜨끈한 수제비 한 그릇씩 받아서 시장골목 좌판 같은 긴 식대(食台)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먹는 풍경과 수제비 맛은 하루의 노동을 끝낸 해방감을 한껏 증폭해줍니다.
연일 계속되는 잔업으로 피곤도 하고 시간도 없어 볼 책이 많이 밀려 있습니다만 저로서는 책 속에는 없는, 이를테면 세상의 뼈대를 접해보는 경험을 하는 느낌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작업이 끝날 무렵이면 다사했던 병인년도 저물게 됩니다. 해마다 세모가 되면 십수년 동안 변함없이 보살펴주신 여러 사람들의 수고와 옥바라지를 돌이켜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고에 값할 만한 무엇을 키워왔는가, 또 이러한 수고에 값하기 위하여 어디에 자신을 세워야 할 것인가를 자문하게 됩니다. 세모는 좀더 깊은 고민을 요구하는 제5의 계절인지도 모릅니다.
한 해 동안의 계수님의 옥바라지에 감사드립니다.
화용, 민용, 두용, 꼬마들을 비롯하여 가내의 평안을 빕니다.

 

1986.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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