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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소(老少)의 차이
계수님께


노소(老少)가 함께 일하는 경우에 노인들은 젊은이에 대하여, 그리고 젊은이는 노인들에 대하여 일정한 불만을 갖게 됩니다. 이는 주로 일을 하는 자세, 일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데 저는 이 점에 있어서만은 노인들을 지지합니다. 노인들의 젊은이들에 대한 불만 중에 가장 자주 듣는 것은, 젊은이들은 일을 여기저기 벌여놓기만 하고 마무리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고 나중 할 일을 혼동하는가 하면 일손을 모아서 함께 해야 할 것도 제각각 따로따로 벌여놓기 때문에 부산하기만 하고 진척이 없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태도가 어디서 온 것인가를 어느 좌상님께 여쭈어보았더니 한마디로 농사일을 해보질 않아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간결하고 정곡을 찌른 지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농사일은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일관된 노동입니다. 일의 선후가 있고, 계절이 있고,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생명인 이를테면 볍씨의 일생이면서 그 우주입니다. 부품을 분업 생산하여 조립 완성하는 공업노동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젊은애들 도회지 나가서 잃는 것이 어디 한둘인가." 그 좌상님의 개탄이 제게는 육중한 무게의 문명비판으로 들립니다.
젊은이들은 노동을 수고로움, 즉 귀찮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비하여 노인들은 거기에다 자신을 실현하고 생명을 키우는 높은 뜻을 부여합니다. 요컨대 젊은이들은 노동을 '소비'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의 소비, 에너지의 소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점 노동을 생산으로 인식하는 노인들의 사고와 정면에서 대립하고 있습니다. 공업노동, 분업노동의 경험은, 더욱이 상품생산, 피고용노동인 경우 노동이 이룩해내는 생산물에 대한 총합적인 가치 인식을 가지기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노동이 그 노동의 주체인 자기 자신을 성장시켜준다는 인격적 측면에 대해서는 하등의 신뢰나 실감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열악한 현장에서 겪은 체험의 소산이겠습니다만, 이러한 태도는 일차적으로는 일 그 자체에 대한 태도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일하는 사람들간의 인간관계에 정착됨으로써 사회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좌상님의 말씀처럼 젊은이들이 도회지에 나가서 잃는 것이면서 또한 우리 시대 자체가 잃어가고 있는 사회 역사적인 문제와도 맥락이 닿아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근대사의 전개과정에서 노출된 수많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시도한 여러 갈래의 운동형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운동들이 농업공동체의 이상에 귀주(歸住)하고자 하는 복고적 성격으로 해서 실패하기도 하고 과학기술의 전(全) 스펙트럼을 회의(懷疑)함으로써 실패하기도 해온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에게 농업과 노인을 배우라는 손쉬운 충고를 할 수가 없음을 느낍니다. 그러한 충고에 앞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과 받아들여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손으로 창조한 것을 자각케 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떠한 사회적 관련을 갖는가, 그리고 자기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과 어떻게 연대되는가를 실감케 하는 부단한 계기를 생활의 현장, 그 경제적 기초 위에 창조해내는 운동이야말로 민중들의 합의된 결단을 이끌어내고 지연, 혈연 또는 작업장이라는 한정된 범위를 뛰어넘어 '공동의 터전'을 이룩하는 길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갈 농촌도 없고 뿌리내릴 터전도 없는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메마른 자세만을 꾸짖는다는 것은 소용 없는 일일 뿐 아니라 너무나 야박한 짓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노인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제가 젊은 사람들의 태도 중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은 젊은 사람들은 미운 사람이 시키는 일이나 별로 의미를 느낄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지극히 냉정한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입니다.
일 그 자체에 몰입해서 무슨 일이건 일이라면 장인(匠人)의 성실성을 쏟는 노인들의 이른바 무의식성에 비하면 젊은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겉보기에 상당히 불성실한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에 담겨 있는 강한 주체성은 의당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노인들에게는 없는 탄력이며 가능성입니다.
거실이 동남향이기 때문에 창 앞에 가면 산과 언덕은 늘 그의 서북면(西北面)을 제게 보여줍니다. 산록의 서북쪽에는 잔설(殘雪)과 음영(陰影)으로 해서 겨울이 최후까지 도사리고 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영상의 따뜻한 날씨는 산언덕에 끈질기게 붙어 있는 겨울을 큰소리 하나 내지 않고 하나하나 녹여내고 있습니다.
어제는 밤새껏 눈을 불러 다시 겨울을 쌓아놓았습니다만 천지 가득히 다가오는 봄기운을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1985.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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