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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실패
형수님께


주역 64괘 중의 맨 마지막 괘가 소위 '미제'(未濟)괘로서 괘사(卦辭)에는 "어린 여우가 물을 거의 건넜을 때 그만 꼬리를 적시고 말았다. 이로운 바가 없다"(小狐汔濟 濡其尾无攸利)라 하였습니다.
지난 가을 교도소 앞 논으로 타작일 도우러 갔을 때의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추수 임시(臨時)에 쏟아진 폭우로 말미암아 물에 잠긴 볏단을 두렁에 옮겨 쌓으면서 우리는 흡사 비에 젖어버린 가을의 꼬리를 들고 섰는 듯 추연한 비감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세모가 되거나 또는 하루를 끝내는 저녁 무렵이 되거나 또는 작은 일 하나 마무리할 즈음에도 항상 어린 여우가 꼬리를 적시는 그 마지막 과정의 '작은 실패'에 생각이 미칩니다. 이러한 어린 여우의 연상은 어떤 일이나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더욱 신중한 태도를 갖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만 지금 생각으로는 그것이 반드시 그런 것만이 아니라고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작은 실패가 있는 쪽이 없는 쪽보다 길게 보아 나은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작은 실패가 있음으로 해서 전체의 국면은 '완결'이 아니라 '미완'에 머물고 이 미완은 더 높은 단계를 향한 새로운 출발이 되어줍니다. 더구나 작은 실패는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자신과 사물을 돌이켜보게 해줍니다. 괘사에도 완결을 의미하는 '기제'(旣濟)는 "형통함이 적고 처음은 길하지만 마침내 어지러워진다"(亨小初吉終亂)고 하여 그것을 미제의 하위에 놓고 있습니다.
도대체 역(易)의 오의(奧義)를 숙지하기도 쉽지 않고 또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도 않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소위(所爲) 가운데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인 '작은 실패'를 간과하지 않는 자기비판의 자세입니다. 실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의 발견이 필요한 것이며, 실패가 값진 것이 아니라 실패의 교훈이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패와 그 실패의 발견, 그것은 산에 나무가 있고 땅 속에 바위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 튼튼한 뼈대를 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아버님 편에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
형님, 형수님, 우용이, 주용이 모두 건강하길 빕니다. 방학 동안에 우용이, 주용이는 평소에 겪기 어렵던 새로운 경험을 풍부히 가져서 생활의 테두리를 훨씬 넓혀갈 수 있기 바랍니다.

 

 

1985.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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