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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모이게 마련
형수님께


비교적 징역 초년에 드러난 저의 약점 중의 하나가 바로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비난이나 증오에 대하여 매우 허약한 체질을 가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자기를 겨누고 있는 증오를 지척에 두고도 편안한 밤잠을 잘 수 있는 심장을 일찍이 길러두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 증오의 부당함을 반론할 수 있는 자유로움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속썩이고 부대끼기 십수년. 지금은 어느 편인가 하면 증오나 모멸에 대하여는 웬만큼 무신경해진 반면 그 대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작은 호의에도 그만 깜짝 놀라는, 허약하기는 마찬가지인, 역전된 체질이 되었다 하겠습니다.
지난번 귀휴 때 제가 감당해야 했던 '불편함'도 아마 이러한 체질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행길에 내놓은 이삿짐처럼 바깥에 나온 '징역살이'가 더 무겁고 고통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저의 심정이 아직 확실한 정처를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형수님께 편지 쓰려니, 손님들과 어른들의 뒷켠에서 계속 설거지만 하시던 모습이 생각나고 정작 형수님과는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였음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귀소하던 날 대전까지 함께 오신 일이 그나마 다행이었던 셈입니다. 우용이와 주용이에게도 마찬가지의 아쉬움이 남습니다만 더 자라기를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지금은 그때의 충격도 모두 가시고 앨범 속에 꽂힌 한 장의 명함판 사진처럼 단정히 정리해두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있습니다.
지난 일요일 TV에서는 폭우로 인한 수재 현장을 중계해주고 있었습니다. 11미터를 넘는 한강 수위를 보여주면서 빨간 오일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표시한 위험지역 속에 이촌동이 들어 있어서 무척 놀랐습니다. 물난리 겪지나 않으셨는지 걱정입니다.
소내(所內)방송에서도 이번의 혹심한 수해 소식을 알리고 재소자들의 성금을 모으고 있습니다만 TV 화면을 통해 학교 교실에 대피한 이재민들의 저녁식사 광경이나 침수된 집에서 침구와 가재도구를 운반해내는 현장을 보고 있는 재소자들의 표정에서 저는 연민이나 애처로움 대신에 부러움의 빛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갇힌 사람들에게는 재난과 불행까지 포함해서 '바깥의 삶' 그 자체가 동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극은 오히려 이쪽이 더 짙다 하겠습니다.
물방울도 모이고 모이면 저토록 거대한 힘을 갖는가. 소양댐의 수문에서 분출되는 물줄기나, 한강을 가득 메운 도도한 강물과 같이 자연의 일부도 거대한 힘을 가지면 제방이건, 건물이건, 사람의 정신이건 모든 취약한 곳을 여지없이 두들겨 부수는 심판자로 등장합니다. 평지를 얻어 명경같이 고요할 때나, 산천을 담으며 유유히 흐를 때나 마찬가지로 약한 것을 두들겨 부술 때에도 물은 역시 우리의 훌륭한 이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물은 모이게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콘트리트 건물의 3층에 살고 있는데도, 우리는 아침마다 신발 속의 귀뚜라미를 털어내고 신발을 신습니다. 가을입니다. 우리는 여름 더위에 지친 건강을 회복하여 다가올 겨울을 견딜 채비를 이 짧은 가을 동안에 해두어야 합니다.

 

 

1984.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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