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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간의 귀휴
계수님께


어제 저녁 두 통 한꺼번에 배달된 계수님의 편지는 나의 생각을 다시 서울로 데려갑니다. 귀휴(歸休)란 돌아가 쉰다는 뜻인데도 아직 마음 편히 쉬기에는 일렀던가 봅니다. 귀휴 기간 동안 내가 해야 했던 것은 우선 엿새 동안에 지난 16년의 세월을 사는 일이었습니다. 16년 세월에 담긴 중량(重量)을 짐지는 일이며, 그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의 통증을 되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 ― 나 자신을, 나도 또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십수년의 세월은 그 빛깔이나 아픔을 훨씬 묽게 만들어주었고 가족들도 그 엄청난 충격을 건강하게 극복해두고 있어서 어떤 것은 마치 남의 일 대하듯 담담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었습니다.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풍화되지 않고 하얗게 남아 있는 슬픔의 뼈 같은 것이 함몰된 세월의 공허와 더불어 잔잔한 아픔으로 안겨오기도 하였습니다. 짐지고 서서 사는 일에는 어지간히 이력이 났거니 생각해온 나로서는 의외다 싶을 정도로 힘겨웠고 가족들의 따뜻한 포용에도 좀체 풀리지 않는 '어떤 갈증'에 목말라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계수님이 편지에 적은 '애정의 안식처'에 대한 갈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애정과 안식의 문제라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옷 입고 섞여보아도 결코 사라지지 못하던 소외감이 그러한 갈구의 부당함을 준열히 깨우쳐주었고 나 자신 이전에 이미 정리해두고 있었던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도소로 돌아오는 형님의 차 안에서 넥타이 풀고, 와이셔츠, 저고리, 바지 등 세상의 옷들을 하나하나 벗어버리고 다시 수의로 갈아입을 때, 그때의 유별난 아픔은 냉정한 이성의 언어를 거부하는 감정의 독립 같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곳에 돌아와 자도자도 끝이 없는 졸음과 잠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던 '휴식'이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귀휴 기간 동안에 내가 힘부쳐 했던 아픔과 갈증은 나 자신의 조급하고 밭은 생각 때문이란 반성을 갖게 됩니다.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으려 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이해받으려 하는' '마음의 가난'에 연유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남에게 자기를 설명하려고 하는 충동은 한마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를 반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어차피 나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 귀착되는 것입니다.
바쁜 동생의 생활 질서를 깨뜨려놓았음은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들만 빼놓고, 여러 사람들을 본의 아니게 교란하지나 않았나 무척 송구스럽습니다. 늘 뒷켠으로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서, 계수님의 표현대로 제일 아랫서열이기 때문에, 항상 어른들과 손님들의 울타리 바깥에서 무언가 내게 주려고 부지런히 오가며 애쓰던 계수님의 표정이 눈에 선합니다. 친정부모님과 동생들께도 나의 '부족한 말씀과 인사'에 대하여 양해 받아주시고 다음을 약속해주시기 바랍니다. 계수님과도 물론 어린이 놀이터에서의 부족했던 이야기 다시 약속합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지켜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곧 나로 하여금 이곳을 견디게 하고 나 자신을 지켜나가게 해주는 힘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1984.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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