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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창조
형수님께


형수님께서 보내주신 {민중 속의 성직자들} 그리고 돈 잘 받았습니다. 그들을 말미암음으로써 우리가 사는 시대를 더욱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키워주는 '응달의 사람들', 소외되고 억눌리고 버려진 사람들 속에 자기 자신을 심고 그들과 함께 고반(苦飯)을 드는 사람과 자비의 이야기들은 뜻있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의 뇌리를 줄곧 떠나지 않는 것은 "우리 시대의 민중은 누구인가?", "우리 사회의 민중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집요한 자문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민중의 든든한 실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민중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한 그 시대, 그 사회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서의 민중, 특히 격변기의 역사무대에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낸 경우의 민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대 사회의 생생한 현재 상황 속에서 민중의 진정한 실체를 발견해내는 데는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착종(錯綜)하는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의 대립, 현실의 왜곡, 사실의 과장, 진실의 은폐 등 격렬한 싸움의 현장에서 민중의 참모습을 발견해내고 그것의 합당한 역량을 신뢰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껏 잡은 것이 민중의 '그림자'에 불과하거나 '그때 그곳의 우연'에다 보편적인 의미를 입히고 있는 등……, 감상과 연민이 만들어낸 민중이란 이름의 허상이 우리들을 한없이 피곤하고 목마르게 합니다. 그것은 '왜 불행한가?'라는 불행의 원인에 대한 질문에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하는 '눈물의 예술'로 그 격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은 위안을 줌으로써 삶을 상실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십수년의 징역살이 그 일인칭의 상황을 살아오면서 민중이란 결코 어디엔가 기성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이 '창조'되는 것이라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응달의 불우한 사람들이 곧 민중의 표상이 아님은 물론, 민중을 만날 수 있는 최소한의 가교(假橋)가 되어주지도 않습니다. 민중을 불우한 존재로 선험(先驗)하려는 데에 바로 감상주의의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민중은 당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계기로 하여 창조되는 '응집되고 증폭된 사회적 역량'입니다. 이러한 역량은 단일한 계기에 의하여 단번에 나타나는 가벼운 걸음걸이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장구한 역사 속에 점철된 수많은 성공과 실패, 그 환희와 비탄의 기억들이 민족사의 기저(基底)에 거대한 잠재력으로 묻혀 있다가 역사의 격변기에 그 당당한 모습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을 이렇게 신성시하는 것도 실은 다른 형태의 감상주의입니다. 어떠한 시냇물을 따라서도 우리가 바다로 나아갈 수 있듯이 아무리 작고 외로운 골목의 삶이라 하더라도 그곳에는 민중의 뿌리가 뻗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민중 특유의 민중성입니다. 부족한 것은 당사자들의 투철한 시대정신과 유연한 예술성입니다.
그 허상의 주변을 서성이며 민중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실패가 설령 그들 각인의 의식과 역량의 부족에 연유된 것이라 할지라도, 저는 그들 개인의 한계에 앞서 우리 시대, 우리 사회 자체의 역사적 미숙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인식과 역량은 기본적으로는 사회적 획득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온 지 두 달입니다만 아직도 쓸고 닦고 파고 메우고 고르고……, 크고 작은 일들로 주변이 어수선합니다. 그러나 새벽의 여름산에서 들려오는 산새소리, 때묻지 않은 자연의 육성은 갖가지 인조음에 시달려온 우리의 심신을 5월의 신록처럼 싱싱하게 되살려줍니다.

 

 

1984.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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