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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과 발전
형수님께


말복날 점심 때 악대부원들이 토끼고기를 보내왔습니다. 악대실습장에서 기르던 토끼를 잡아서 주전자에다 끓인 소위 '토끼찌개'입니다. 서화반 아홉 식구 중에서 반은 먹지 않고, 반은 맛있게(?) 먹었는데 저는 작년 겨울과는 달리 금년은 먹은 쪽입니다. 저녁에 악대부원들이 입방하여 다들 나를 먹지 않은 쪽으로 꼽다가 먹은 게 드러나자, 어떤 사람은 '타락'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발전'이라 하였습니다. 제 자신도 이를 발전이라고 치고 있는데, 아침 나절 토끼 두 마리를 잡느라 장정 여섯 명이 달려들어 법석을 떨던 도살의 이야기는 난생 처음 먹은 뱃속의 토끼고기를 몹시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맹자}의 [곡속장](觳觫章)에 토끼는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선왕(齊宣王)이 어느날 흔종(釁鍾)을 하기 위해 제물(祭物)로 끌려가는 소를 목격하고는 '벌벌 떨면서 죄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소가 애처로워'(不忍其觳觫若 無罪而就死地) 소를 양으로 바꾸라 하였습니다. 이는 재물을 아끼어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하였으므로 양은 참을 수 있으나 소는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맹자는 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높이 사서 제선왕에게서 보민(保民)의 덕(德)을 보았던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작년 겨울의 토끼고기는 먹지 않았고 금년 여름의 토끼고기는 먹었는데, 제선왕의 경우와는 반대로 작년 겨울의 토끼는 보지 못하였고 금년 여름의 토끼는 제가 6공장에서 새끼 두 마리를 손수 얻어다가 건네주었을 뿐 아니라 운동시간에도 가끔 토끼장을 찾아보기까지 한 것입니다. 왕실 궁정의 한가로운 인의(仁義)가 누항(陋巷)의 조야(粗野)한 현실에 통할 리도 없고, 또 중토끼 두 마리를 스무 명이 나누어 먹은 찌개가 '피가 되고 살이 될' 리도 없고 보면 토끼에 얽힌 우리의 이야기를 '보민의 덕'이나 '보신(補身)의 욕(慾)'이란 개념으로 환원해버리기에는 훨씬 복잡한 내용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측은지심은 대개 죽음과 관련되는 것에서 민감하게 촉발되는 것이지만, 사실은 살아가는 문제, 특히 선량하게 살아가는 문제와 더욱 깊숙히 관련되는 것이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의 감상적 차원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머님의 평가가 염려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타락'보다는 '발전'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듭니다.

 

 

1983.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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