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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순이
형수님께


'꽃순이'는 밤이면 쥐들의 놀이터가 되는 악대실습장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악대부원들이 겨우겨우 구해온 고양이의 이름입니다.
지금은 가출(?)해버린 지 일 년도 더 넘어서 몰라볼 만큼 의젓한 한 마리의 '도둑고양이'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꽃순이라는 이름을 비웃기나 하듯 솔방울만한 불알을 과시하며 '쥐와 고양이의 대결'로 점철된 교도소의 밤을 늠름하게 걷는 모습을 먼 빛으로 가끔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처음 고양이를 데려왔을 때는 꽃순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귀여운 새끼고양이였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의한 부양과 사람들의 무분별한 애완은 금방 고양이를 무력하게 만들고, 고양이로서의 자각을 더디게 하여 아무리 기다려도 쥐들을 자기의 먹이나 적으로 삼을 생각을 않았습니다. 쥐들로부터 찬장과 빨래, 책 등을 지키게 하려던 애초의 의도가 무산되자 이제는 사람들의 경멸과 학대가 영문 모르는 새끼고양이를 들볶기 시작했습니다. 높은 데서 떨어뜨려지기도 하고 발길에 채이기도 하고, 연탄불 집게에 수염이 타기도 하고, 안티플라민이 코에 발리기도 하는 등……, 강훈(强訓)이란 이름의 장난과 천대 속에 눈만 사납게 빛내다가 드디어 어느날 밤 비닐창문을 뚫고 최초의 가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고양이에게 가출은 또 다른 고생과 위험의 연속이었습니다. 우선 강아지만한 양재공장의 검은 고양이가 자기의 영지에 침입한 이 새끼고양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밤중에 꽃순이의 자지러지는 비명을 듣기도 하고 다리를 절며 후미진 곳으로 도는 처량한 모습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후 꽃순이는 몇 차례 제 발로 돌아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테니스 네트로 수렵을 당하여 묶여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뜻깊은 사실은, 이처럼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는 동안 이제는 사랑도 미움도 시들해져버린 악대부원들의 관심 밖으로 서서히 그리고 완전히 걸어나와 '고양이의 길'을 걸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에는 꽃순이가 양재공장의 검은 고양이와 격렬한 한판 승부에서 비기는 현장을 목격하고 꽃순이의 변모와 성장을 대견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밤중에 고양이소리가 나면 우리 방의 악대부원 서너 명은 얼른 창문을 열고 지나가는 고양이를 향해 "꽃순아!" 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아는 척을 합니다. 그러나 꽃순이는 사람들의 기척에 잠시 경계의 몸짓을 해보일 뿐 이쪽의 미련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꽃순이'라는 옛날의 이름으로 부르는 쪽이 잘못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꽃순이에 대한 다음의 이야기는 쓰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만 생각 끝에 덧붙여두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은 며칠 전 악대부원 몇 사람과 함께 지도원 휴게실에 들렀다가 거기서 우유며 통조림을 얻어먹고 있는 꽃순이를 본 사실입니다. 언제부터 먹을 것이 많은 이 지도원실을 드나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날의 꽃순이는 먼 빛으로 보며 대견해했던 '밤의 왕자'가 아니었습니다. '가발공장에 다니던 영자를 중동(中洞) 창녀촌에서 보았을 때의 심정'을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꽃순이의 실패'도 '중동의 영자'나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그가 겪었을 모진 시련과 편력을 알지 못하는 '남'들로서는 함부로 단언할 수 없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198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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