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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명(罪名)과 형기(刑期)
계수님께


생전 처음 만나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우리는 결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겉모양이나 몇 개의 소문으로 그를 온당하게 평가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좀더 가까운 자리에서 함께 일하며 그리하여 깊이 있는 인식을 마련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까닭은 이쪽의 개인적인 조급 때문이기도 하지만 크게는 인간관계가 기성의 물질적 관계를 닮아버린 세속의 한 단면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현상은, 모두가 이마에 죄명과 형기를 낙인처럼 가지고 있는 징역살이에서 쉽게 발견됩니다. 죄명은 그 사람의 '질'을, 형기는 그 질의 '정도'를 상징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 이상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곳이 형벌의 현장이므로 일견 당연한 듯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으려는 경원(敬遠)과 불신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이렇듯 멀리 두고 경원하던 사람도 일단 같은 방, 같은 공장에서 베 속의 실오리처럼 이런저런 관계를 맺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관점이 열립니다. 죄명, 형기, 소문, 인상과 같은 기성의 껍질이 하나씩 하나씩 벗겨져 나가고 대개의 경우 전혀 판이한 본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관계'는 '관점'을 결정합니다.
행티 사나운 심사와 불신의 어두운 자국이 도리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와 인간에 대한 관념적이고 감상적인 인식으로부터 시원히 벗어나게 하고 있음을 보거나, 세상의 힘에 떠밀리고 시달려 영악해진 마음에 아직 맑은 강물 한 가닥 흐르고 있음을 볼 때에는, 문패처럼 그의 이마에서 그를 규정하고 있는 것들이 그에게 얼마나 부당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바늘 구멍으로 황소를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경우에는 이 바라본다는 행위는 그를 알려는 태도가 못됩니다.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 평면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이기에 그렇습니다. 한편이 되어 백지 한 장이라도 맞들어보고 반대편이 되어 헐고 뜯고 싸워보지 않고서 그 사람을 알려고 하는 것은 흡사 냄새를 만지려 하고 바람을 동이려 드는 헛된 노력입니다.
대상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라보는 경우, 이 간격은 그냥 빈 공간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선입관이나 풍문 등 믿을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지고, 이것들은 다시 어안(魚眼)렌즈가 되어 대상을 왜곡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풍문이나 외형, 매스컴 등,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인식은 '고의'보다는 나을지 모르나 '무지'보다는 못한 진실과 자아의 상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저는 이곳에서 사람을 보면 먼저 죄형과 형기를 궁금해하는 부끄러운 습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과 진실, 본질과 진리에 대한 어설픈 자세가 아직도 이처럼 부끄러운 옷을 입혀놓고 있는가 봅니다.
어디 풀싹이 나오지 않았나 하고 자주 창 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놀라 깨우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연초록 봄빛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양지의 풀이나 버들가지가 아니라, 무심히 지나쳐버리던 '솔잎'이라는 사실입니다. 꼿꼿이 선 채로 겨울과 싸워온 소나무의 검푸르던 잎새에 역시 가장 먼저 연초록 새빛이 피어난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198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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