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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뵈는 어머님
어머님께


3월 중순인데도 뒤늦게야 해살맞은 바람에다 엊그제 저녁은 진눈깨비 섞인 비까지 흩뿌립니다. 올봄도 계절을 정직하게 사는 꽃들이 늦추위에 떠는 해가 되려나 봅니다.
세전(歲前)에 아버님 혼자 오셨을 때 아버님께선 날씨 탓으로 돌리셨지만 저는 어머님이 몸져 누우신 줄 짐작하였습니다. 접견 마치고 혼자 소문(所門)을 나가시는 아버님을 이윽고 바라보았습니다. 아버님은 어머님과 함께 걸으실 때도 언제나 네댓 걸음 앞서 가시지만 그날은 아버님의 네댓 걸음 뒤에도 어머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설마 치레 잦은 감기몸살이겠거니 하고 우정 염려를 외면해왔습니다만 막상 형님 편에 그것이 매우 위중한 것임을 알고부터는 연일 꿈에 어머님을 봅니다.
꿈에 뵈는 어머님은 늘 곱고 젊은 어머님인데 오늘 새벽 잠깨어 새삼스레 어머님 연세를 꼽아보니 일흔여섯, '극노인'(極老人)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징역 들어오고 난 최근의 십수년이 어머님의 심신을 얼마나 깊게 할퀴어놓은 것인지도 모르고 제 나이를 스물일곱인 줄 알듯이, 어머님도 매양 그전처럼만 여겨온 저의 미욱함이 따가운 매가 되어 종아리를 칩니다.
인제 죽어도 나이는 아까울 게 없다 하시며 입 다물어버리신 그 뒷말씀이 기실 저로 인하여 가슴에 응어리진 한(恨)임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제게도 어머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응어리가 되어 쌓입니다. 언젠가는 어머님과 함께 어머님의 이 응어리진 아픔에 대하여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이 아픔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같은 세월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아픔을 속에 담고 있으며 그것은 어머님의 그것과 어떻게 상통(相通)되는가, 냇물이 흘러흘러 바다에 이르듯 자신의 아픔을 통하여 모든 어머니들이 가슴에 안고 있는 그 숱한 아픔들을 만날 수는 없는가, 그리하여 한 아들의 어머니라는 '모정의 한계'를 뛰어넘어, 개인의 아픔에서 삶의 진실과 역사성을 깨달을 수는 없는가…….
접견은 짧고 엽서는 좁아 언제나 다음을 기약할 뿐인 미진함은 저를 몹시 피곤하게 합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어머님께선 이미 이 모든 것을 달관하고 계실 뿐 아니라 누구보다도 깊이 저를 꿰뚫어보고 계심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자막여부(知子莫如父). 자식을 아는 데는 부모를 덮을 사람이 없다는 옛말처럼, 어머님은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저를 잘 아시고 또 저의 친구들을 숱하게 아실 뿐 아니라 빠짐없이 공판정에 나오셔서 어느덧 어머님의 생각의 품 바깥으로 걸어나와버린 아들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시려던 그때의 모습을 회상하면, 아마 어머님은 제가 어머님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저를 알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어머님의 모정은 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만큼 품이 넓고 그 위에 아들에 대한 튼튼한 신뢰로 가득 찬 것이라 믿습니다.
기다림은 더 많은 것을 견디게 하고 더 먼 것을 보게 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눈을 갖게 합니다. 어머님께도 기다림이 집념이 되어 어머님의 정신과 건강을 강하게 지탱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머님께서 걱정하시던 겨울도 가고 창 밖에는 갇힌 사람들에게는 잔인하리만큼 화사한 봄볕이 땅 속의 풀싹들을 깨우고 있습니다.

 

 

198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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