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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근탕과 춘향가
아버님께


춥기 전에 한번 오시겠다던 하서가 있은 지 오래여서 혹시 어머님께서 편찮으신가 염려되던 차 계수님 편지, 아버님 하서 잇달아 닿아서 마음 놓입니다. 어제 그제는 띄엄띄엄 눈발 흩날리고 오늘은 또 대한(大寒) 땜하느라 제법 쌀쌀한 편이지만 금년은 대소한(大小寒) 다 지나도록 큰 추위 한번 없는 셈입니다. 겨울을 아직 반도 더 남겨놓아서 두고봐야 알겠지만, 우선은 심동(深冬)을 수월히 지내고 있습니다.
{사명당실기}에 대한 학계와 종단의 평이 좋다는 소식은 아버님, 어머님과 함께 저도 마음 흐뭇한 일입니다. 이곳에 함께 계신 분들도 사명당 연구에 관한 한 결정판이라 함에 이견이 없습니다. 방대한 자료를 두루 망라하시고 시종 사실(史實)에 근거를 둔 냉정한 필법은 역사서술의 한 전형이라 하겠습니다.
젊은이들은 환풍호우(喚風呼雨)하는 사명대사의 도술이 사라져버리자 조금은 서운한 눈치입니다만 사명당에 얽힌 갖가지 도술과 일화들은, 한 시대의 복판을 사심 없이 앞장서 간 위인에게 민중들이 바치는 애정의 헌사(獻辭)라는 점에서 도리어 '민중적 진실'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며칠 전 독감 들어서 가벼이 읽을거리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갈근탕'(葛根湯)을 소개한 글을 읽었습니다. 갈근탕은 갈근 너 푼에 마황(麻黃), 계피, 작약(芍藥), 감초, 대추 각 두 푼, 그리고 건강(乾薑) 한 푼으로 첩을 짓는 한방인데, 주독(酒毒)을 가시고 열을 삭히는 약으로 널리 사용되어오는 민간 전래의 처방이라고 합니다. 순전히 풀뿌리와 열매와 나무껍질로 된 천연생약이라 글로써 읽는 것만으로도 신선한 느낌이 듭니다. 광고의 홍수와 더불어 쏟아져나온 수많은 합성약품으로 할퀴어진 심신에 상쾌한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같습니다.
두꺼운 약탕관에 담아 볕바른 마루 끝에서 이윽고 달인 다음 삼베 약수건에 쏟아 사기대접에 알뜰히 짜내어 약손가락으로 재어보고 훈김 불어가며 마시는 풍경은, 어머님의 옛모습과 함께, 생각만 해도 마음 훈훈히 풀리는 정경입니다.
아버님께서 보내주신 {열여 춘향슈졀가} 주역본(註譯本)은 마치 훈김이 이는 탕약(湯藥) 같습니다. 외국어의 구문과 표현으로 이도저도 아닌 국적 불명의 문장이 되어버린 오늘의 글을 합성약품에 비긴다면 옛되고 무구한 우리 고유의 글월이 본래의 자태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이 전주 목판의 슈졀가는 그 훈훈하기가 바로 갈근탕의 격조입니다.
광고와 외래어의 범람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는 '징역의 격리'는 땟국 씻어내고 우리 글 본디의 광택을 되찾는 데에도 마침 다행한 장소이기도 하겠다 싶습니다.
겨울 추위에 어머님, 아버님 보중(保重)하기기 바랍니다.

 

 

1983.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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