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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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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어머니
어머님께


함께 징역 사는 사람들 중에는 그 처가 '고무신 거꾸로 신고' 가버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런가 하면 상당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짧지 않은 연월(年月)을 옥바라지 해가며 기다리는 처도 없지 않습니다. 이 경우 떠나가버리는 처를 악처라 하고 기다리는 처를 열녀(?)라 하여 OX 문제의 해답을 적듯 쉽게 단정해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세상살이의 순탄치 않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곳 벽촌(碧村) 사람들은 기다리는 처를 칭찬하기는 해도 떠나가는 처를 욕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떠남과 기다림이 결국은 당자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마음'을 탓하기에 앞서 그런 마음이 되기까지의 사연을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가(媤家)에 남아 있는 사람, 친정에 돌아가 얹혀 사는 사람, 의지가지 없어 술집에라도 나가 벌어야 하는 사람……. 그 처지의 딱함도 한결같지 않습니다. 개중에는 마음마저 부지할 수 없을 정도의 혹독한 처지에 놓인 사람도 허다합니다. 그 처지가 먼저이고 그 마음이 나중이고 보면 마음은 크게는 그 처지에 따라 좌우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징역 간 남편에 대한 신뢰와 향념(向念)의 정도에도 그 마음이 좌우됨을 봅니다. 이 신뢰와 향념은 비록 죄지은 사람이기는 하나 그 사람됨에 대한 아내 나름의 평가이며, 삶을, 더욱이 힘든 삶을 마주 들어봄으로써만이 감지할 수 있는 가장 적실한 이해이며 인간학입니다.
떠나가는 처를 쉬이 탓하지 못하는 까닭은 이처럼 그 아내의 처지와 그 남편의 사람됨을 빼고 나면 그 아내가 책임져야 할 '마음'이란 기실 얼마 되지 않는 한 줌의 '인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정이란 것도 사람의 도리이고 보면 함부로 업수이 보아넘길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러기에 고무신 거꾸로 신고 가버린 처를 일단은 자책과 함께 이해는 하면서도 그 매정함을 삭이지 못해 오래오래 서운해 하는가 봅니다.
처의 경우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음에 비하여 '어머니'의 경우는 태산부동(泰山不動) 변함이 없습니다. 못난 자식일수록 모정은 더욱 간절하여 세상의 이목도, 법의 단죄도 개의치 않습니다. 심지어는 개가(改嫁)해간 어머니의 경우도 새 남편 알게 모르게 접견 와서 자식을 탓하기에 앞서 먼저 당신을 탓하며 옷고름 적시는 일도 더러 있습니다. 처와 어머니는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여자의 두 얼굴이지만 처는 바로 이 점에서 아직도 어머니의 어린 모습입니다. 모야천지(母也天只). 어머님의 마음은 언제나 열려 있는 하늘입니다.
불안한 처 대신 제게 태산 같은 어머님이 계시다는 것은 평소에는 잊고 있는 마음 든든한 행복입니다. 겨울밤에 잠깐 잠이 깰 때에도 등불처럼 켜져 있는 어머님의 마음을 생각하면 흡사 어릴 때 어머님의 곁에서 재봉틀소리에 잠든 듯 마음이 따스해집니다. 지금은 어머님께서도 연로하시어 재봉틀 앞에 앉으실 일도 없으시고 저도 또한 어머님을 멀리 떠나 그 맑은 재봉틀소리 들을 수 없습니다만 저는 가끔 수돗물소리나, 호남선 밤차소리에 문득문득 어머님의 그 재봉틀소리를 깨닫곤 합니다.
한 해가 저무는 세밑쯤이면 더욱 심상(心傷)해 하시는 어머님께 오늘은 고담(古談) 하나 들려드리며 세모의 인사에 대(代)하려 합니다.
옛날 어느 시아버지가 있었는데 끼니 때마다 눈썹 가지런히 제미(齊眉)하여 밥상 올리는 며느리가 하도 예뻐서 어느날 그만 망녕되이 쪽, 하고 며느리의 젖을 빨고 말았습니다. 혼비백산 버선발로 뛰쳐나온 며느리가 제 서방에게 이 변고를 울음 반 말 반으로 토설(吐說)하였습니다. 분기탱천한 서방이 사랑문을 열어젖히고 아버지께 삿대질로 호통인즉 "남의 마누라 젖을 빨다니 이 무슨 망녕입니까!", 아버지 왈 "너는 이놈아, 내 마누라 젖을 안 빨았단 말이냐!" 되레 호통이었답니다.

 

 

1982.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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