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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락에 달을 밟고 서서
계수님께


지난 달 25일 서화반 열 식구는 정향(靜香) 선생님 댁을 방문하였습니다.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 버스로 40분, 걸어서 다시 20분, 칠십 노인이신 선생님께서 매주 이 길을 거슬러 우리를 가르치러 오시기에는 매우 먼 길이다 싶었습니다.
우리는 코스모스가 줄지어 선 시골 국민학교 앞에 버스를 맡겨놓고, 왼쪽 오른쪽에 번갈아 산자락을 끼고 천천히 걸었습니다. 추양(秋陽)을 받은 단풍잎은 최후의 꽃인 양 가지 끝에서 빛나기도 하고 더러는 소임을 마치고 땅에 떨어져 뿌리를 덮어주고 있었습니다. 타작마당을 지나고, 마중 내려오는 시냇물을 옆으로 흘려보내며, 가득히 홍시를 달고 커다란 꽃나무로 서 있는 감나무 샛길을 돌아나오자 이태조가 도읍하려던 계룡산 밑 신도(新都) 안이 건너다 보이는 언덕바지에 부여의 고가(古家)를 옮겨다 지은 서른 간 기와집이 처마에 은은한 풍경소리를 가을바람에 뿌리고 있었습니다.
궁항격심철 파회고인거(窮巷隔深轍 頗回故人車). 산촌에 살아 벗들이 수레를 돌려 그냥 가더라던 도연명의 고향을 보는 듯하였습니다. 분주와 소음이 사람들을 마구 달음박질케 하는 도시의 고속과는 판이한 슬로 비디오의 세계가 거기 한가롭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서재에는 몇 대를 물려온 서책(書冊), 지필묵연(紙筆墨硯), 골동(骨鉥), 편액(扁額), 족자(簇子) 들이 제가끔의 자리에서 유원(幽遠)한 세월의 풍상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소장하신 명필들의 진적(眞蹟)과 고서화(古書畵), 서권(書卷) 들을 일일이 펼쳐서 일러주시는 동안 우리는 잠시 100년 전을 방문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점심상에는 칠순의 할머님이 지켜오신 우리 고유의 음식들이 메말라붙은 우리의 미각을 깨워주고 있었습니다. 산채, 고추전, 청국장, 도토리묵……어느 것 하나 시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 상품 특유의 반지빠른 겉모양 대신 정갈하고 따뜻한 인정이 그릇마다 소복소복하였습니다.
사재(私財)를 들여 건립한 단군숭전(檀君崇殿)과 우뚝한 석비(石碑)는, 담뱃대로 가리키시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천 정기가 아니더라도 우리 것을 간수하려는 고독한 집념이 자못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기웃거려 본 것이기는 하나 정향 선생님의 주변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생활 전반'에서 고수되고 있는 완강한 전통의 자취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복고의 취향을 넘어선 것으로 풍진(風塵) 세상에 홀로 잠못 이루어 뜨락에 달을 밟고 서 있는 지사(志士)의 불면(不眠)을 연상케 하는 것입니다. 전통의 고수가 흔히 완매(頑昧)한 보수가 되거나 파시즘의 장식물이 되던 사례(史例)도 적지 않았습니다만, 가장 보수적인 것이 가장 전위적(前衛的)인 역할을 담당하는 시절도 있을 뿐 아니라 농촌이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도 그 지역적 특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이 가장 적게 무너진 곳이며 서풍에 맞바람칠 동풍의 뿌리가 박혀 있는 곳이라는 데서 찾아야 된다는 사실도 귀중한 교훈으로 간직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오셔서 여러 가지 이야기 들려주셨습니다. 아버님 생신 때 모인 가족들 이야기며 작은며느리 음식 장만이며 두용이 노는 양이며 가지가지였습니다. 어느새 11월도 중순, 짧은 가을에 긴 겨울, 우리는 바깥 사람들보다 일찍이 겨울을 채비하여야 합니다. 아버님께서 교무과로 우송하신 {사명당실기}도 잘 받았습니다.

 

 

198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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