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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님의 추억
아버님께


아버님께서 골라주신 서제(書題)들은 가까운 이웃처럼 친숙한 글들과 일견 평범한 듯하면서도 물처럼 소중한 글들이 많아 평소 아버님의 가르침인 듯합니다.
할아버님 묘표(墓表)는 아침녘 조용한 때를 택하여 습자(習字)하고 있습니다. 이번 가을 동안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학교도 들기 전의 어린 시절, 할아버님 앞에서 유지(油紙)를 펴고 붓글씨를 배우던 제가 이제 막상 할아버님의 비문을 쓰려고, 그것도 옥중에서 붓을 잡으니 할아버님의 추억과 함께 세월이 안겨주는 한아름의 감개가 가슴 뻐근히 사무칩니다.
말씀하신 {서도대전}(書道大典)은 그 내용을 보지 못해 무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제가 가진 오체자휘(五體字彙)와 여러 서첩(書帖) 등으로 그리 불편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바쁜 중에 형님 다녀갔습니다. 제 일로 인하여 너무 노심하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담담하고 유연한 자세는 어려움을 건너는 높은 지혜라 생각됩니다.
처서(處暑) 지낸 추량(秋凉)이 우리의 정신을 한층 명징케 해주는 계절입니다. 가을 동안에는 어머님께서도 기력이 더욱 실하여지시고 아버님께서도 연학(硏學)에 진경(進境)이 있으시길 빕니다.

 

 

1981.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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