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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아버님께


추석이 다른 명절과 다른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부모님을 찾아뵙고, 형제들을 찾고, 조상을 찾아 산소에 성묘하는 등 추석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찾게 됩니다.
6, 7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로 말미암아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고향과 가족을 떠나서 객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제 때보다 그 수가 더 많다고 합니다. 이처럼 객지를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해마다 추석이 되면 엄청난 귀성인파가 되어 역이나 버스터미널에 운집합니다. 객지에서 고향으로 향하는 숱한 행렬은 흡사 뒤틀린 몸뚱이를 뒤척여 본래 자리로 돌이키려는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막상 추석이 되어도 이 거대한 행렬 속에 끼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산가족은 물론 가산을 정리해서 아예 고향을 떠나버린 사람들을 비롯해서, 객지 나와서 돈 벌기는커녕 지지리 고생만 하는 젊은 남녀에 이르기까지, 추석이 다가와도 열차표나 고속버스표 한 장 끊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함께 징역 사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열에 일고여덟은 추석 때의 괴로웠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고향 마을 입구까지 갔다가 먼 빛으로 동네 지붕만 바라보다가 도로 발길을 돌렸다는 어느 윤락녀의 이야기도 있고, 밤중에 고향집 담 너머 몰래 돈지갑을 던지고 도망쳐온 의적(?) 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것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라기보다 차라리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만약 추석 명절에 귀성객이 한 사람도 없다면 어떨까. 역이나 터미널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는 그런 추석이란, 생각만 해도 삭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한 추석 그러한 사회는 설사 높은 물질적 풍요를 누린다 하더라도 삭막한 것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귀성객이 그 사회의 활성(活性)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적은 귀성객이 그 사회의 질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처럼 반세기가 채 못되는 기간 동안에, 이민족의 침략과 조국의 패망과 광복과 전쟁과 분단을 숨가쁘게 겪어야 했던 격동의 현대사는 추석 명절에 대해서도 선명한 각인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추석 명절의 엄청난 귀성인파는 이를테면 우리 사회 속에 구조화되어 있는 소외의 외화체(外化體)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공동체의 몸부림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석을 이곳에서 보내야 하는 저희들의 처지도 이러한 소외의 특수한 형태임은 물론입니다.
어머님께서 건강하시던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추석 즈음에 어머님, 아버님께서 접견 다녀가시면 이곳의 여러분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곤 했습니다. "자네가 부모님을 찾아뵈어야 하는 건데……, 불효일세." 지금은 어머님께서 기동이 어려우시고 아버님 또한 극로(極老)하셔서, 추석이 되면 내심 다행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명절 세배는 제가 못다하고 있는 숱한 도리 가운데 작은 하나일 뿐임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저희 방에는 큼직한 동창(東窓)이 있어서 보름달은 물론 산을 오르는 성묘객들의 모습도 잘 보입니다. 이번 추석에는 어머님의 창에도 크고 환한 보름달 둥실 떠오르길 빕니다.

 

1987.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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