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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에 두 손

   시와 산문을 묶어서 이야기하자니 시 정신과 산문 정신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논리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와 산문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감성과 정서의 영역으로 함께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의 중에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기억되지만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heart)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심에 있다는 의미는 사상을 결정하는 부분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head)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고 해왔던 것이지요.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關係論의 장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가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새삼스럽게도 다시 가슴의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앞으로 시와 산문을 더 많이 읽으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사철文史哲과 나란히 시서화詩書畵에 대한 교육을 병행해왔다는 이야기를 강의 초반에 나누었습니다. 이성 훈련과 감성 훈련을 병행했던 것이지요. 물론 오늘날의 시서화가 그러한 정신을 옳게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만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그 정서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부언해둡니다.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肉化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 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상은 지붕 위에서 던지는 종이비행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思考 이전의 가장 정직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러한 정서와 감성을 기르는 것은 인성人性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 최후의 방법입니다.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마음씨가 바르고 고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사상의 장場을 문사철의 장으로부터 시서화의 장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시서화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시서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어주고,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합니다.

  『시경』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시적 정서는 하나의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게 해줍니다. 공간적으로 상하좌우의 여러 지점地點을 갖게 해줄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춘하추동의 여러 시점時點을 갖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무엇과 어떻게 관계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시적 정서와 마찬가지로 서書와 화畵의 영역 역시 풍부한 관계론의 담론을 보여줍니다. “서書는 여如”라고 합니다. 서의 의미는 ‘같다’는 것이지요. 우선 글자와 그 글자가 지시하는 대상이 같다는 뜻입니다. 지시 기호이기 때문에 당연한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자의 경우 서書가 상형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새 을乙’ 자는 모양이 백조입니다. 그러나 같다는 의미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 같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가 오히려 서도書道의 본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미적 정서, 나아가 그 사람의 사상, 그 사람의 인격이 서書에 고스란히 담긴다는 뜻이지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사람과 서의 관계론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합니다만 그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림은 우선 ‘그림’이라는 의미에 충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은 ‘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일체가 되는 행위입니다. 대단히 역동적인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나아가 그림은 우리 사회가 그리워하는 것, 우리 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처럼 시와 문 그리고 서와 화라는 정서적 영역은 우리의 독법인 관계론을 확장하고 다시 그것을 인격화할 수 있는 소중한 영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와 산문을 함께 읽지 못하지만 유종원柳宗元(773∼819)의 시 한 편과 산문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유종원은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왕숙문王叔文의 당여黨與가 되어 혁신 정치 집단을 만든 개혁 사상가였습니다. 그러나 귀족 관료와 번진藩鎭 세력이 연합한 보수 집단의 반격으로 말미암아 개혁은 좌절되고 그는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봉건론」封建論, 「천설」天說 등은 역사 인식에 있어서 그 진보성이 높이 평가됩니다. 당시의 유가들의 일반적 견해와는 달리 군현제가 필연적임을 역설하여 진시황의 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특히 「천설」에서는 천명론天命論과 봉건적 지배 체제를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또한 그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서 한유韓愈와 더불어 당대의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산문 개혁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문장은 한유와 겨루고 시는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다음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5언 절구 「강설」江雪은 당대 이후 인구에 회자되는 명시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이 시는 몇 자 안 되는 짧은 시구에도 불구하고 마치 눈앞에 보듯 선명한 그림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이 함의하는 메시지의 날카롭기가 칼끝 같습니다.

   千山鳥飛絶 萬徑人踪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에는 사람의 발길 끊어졌는데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홀로
   눈보라 치는 강에 낚시 드리웠다.

   이 시가 보여주는 그림은 동양화에서 자주 보는 풍경 같기도 하고 도연명陶淵明의 전원田園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풍설이 휘몰아치는 강심江心에서 홀로 낚시 드리우고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은 필시 그의 자화상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 시에 관련된 시화詩話를 따로 접할 수 없어서 정확한 시작詩作 의도를 알 수 없지만 이 시에서 우리가 읽게 되는 것은 그의 고독한 고뇌입니다. 개혁 의지의 끝없는 좌절로 점철되어 있는 역사의 대하大河입니다.

   다음은 유명한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입니다. 전문全文은 너무 길기 때문에 앞부분만 소개합니다. 해석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의 함의含意는 여러분이 읽어내기 바랍니다.

   郭橐駝不知何始名 病僂隆然伏行 有類橐駝者 故鄕人號曰駝
   駝聞之曰 甚善 名我固當 因捨其名 亦自謂橐駝云
   其鄕曰 豊樂 鄕在長安西
   駝業種樹 凡長安豪家富人爲觀游 及賣果者 皆爭迎取養視
   駝所種樹 或遷徙無不活且碩茂 蚤實而蕃
   他植木者 雖窺伺傚慕 莫能如也
   有問之對曰 橐駝非能使木壽且孶也 以能順木之天 以致其性焉爾
   凡植木之性 其本欲敍 其培欲平 其土欲故 其築欲密
   旣然已勿動勿慮 去不復顧
   其蒔也若子 其置也若棄 則其天者全 而其性得矣
   故吾不害其長而已 非有能碩而茂之也
   不抑耗其實而已 非有能蚤而蕃之也
   他植木者不然 根拳而土易 其培之也 若不過焉 則不及焉
   苟有能反是者 則又愛之太恩 憂之太勤
   旦視而暮撫 已去而復顧
   而甚者爪其膚以驗其生枯 搖其本以觀其疎密
   而木之性日以離矣
   雖曰愛之 其實害之 雖曰憂之 其實讐之
   故不我若也 吾又何能爲哉

   곽탁타의 본 이름이 무언지 알지 못한다. 곱사병을 앓아 허리를 굽히고 걸어다녔기 때문에 그 모습이 낙타와 비슷한 데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탁타’라 불렀다. 탁타가 그 별명을 듣고 매우 좋은 이름이다, 내게 꼭 맞는 이름이라고 하면서 자기 이름을 버리고 자기도 탁타라 하였다. 그의 고향은 풍악으로 장안 서쪽에 있었다. 탁타의 직업은 나무 심는 일이었다. 무릇 장안의 모든 권력자와 부자들이 관상수觀賞樹를 돌보게 하거나, 또는 과수원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과수果樹를 돌보게 하려고 다투어 그를 불러 나무를 보살피게 하였다. 탁타가 심은 나무는 옮겨 심더라도 죽는 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잘 자라고 열매도 일찍 맺고 많이 열었다. 다른 식목자들이 탁타의 나무 심는 법을 엿보고 그대로 흉내 내어도 탁타와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자라게 하거나 무성하게 할 수가 없다. 그 결실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일찍 열매 맺고 많이 열리게 할 수가 없다.

   다른 식목자는 그렇지 않다. 뿌리는 접히게 하고 흙은 바꾼다. 흙 북돋우기도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한다. 비록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지나치고 그 근심이 너무 심하여, 아침에 와서 보고는 저녁에 와서 또 만지는가 하면 갔다가는 다시 돌아와서 살핀다. 심한 사람은 손톱으로 껍질을 찍어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사하는가 하면 뿌리를 흔들어보고 잘 다져졌는지 아닌지 알아본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나무는 차츰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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