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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禮란 기르는 것이다

   순자 사상의 논리적 전개 과정에 따라 먼저 예론禮論을 검토한 다음에 교육론敎育論을 읽기로 하겠습니다. 그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세하게 번역하거나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순자 사상의 체계와 전체적 구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禮起於何也 曰 人生而有欲 欲而不得 則不能無求 求而無度量分界 則不能不爭 爭則亂 亂
   則窮 先王惡其亂也 故制禮義以分之 以養人之欲 給人之求 使欲必不窮
   乎物 物必不屈於欲 兩者相持而長 是禮之所起也 故 禮者養也        
   ―「禮論」
   예禮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은 나면서부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욕망이 충
   족되지 못하면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욕망을 추구함
   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없다면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다툼이 일어
   나면 사회는 혼란하게 되고 혼란하게 되면 사회가 막다른 상황에 처
   하게 된다. 옛 선왕이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의를 세워서
   분별을 두었다.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
   이 예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예란 기르는 것이다.

   순자의 예론은 사회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 이론입니다. 첫째 예란 물物을 기르는 것(養)이며, 둘째 그 물로써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되 물질의 생산과 소비에 일정한 한계를 두어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예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경우의 예란 당연히 사회의 제도와 규범입니다. 제도와 규범이 분계分界를 세워서 쟁란爭亂을 안정적으로 방지한다는 것입니다. 순자의 예는 후에 법이 됩니다.

   순자의 가장 큰 공헌이 바로 이 예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새롭게 정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예는 공자의 주례周禮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순자의 예는 전국시대의 예이며, 이 전국시대의 예가 바로 법으로서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에 도덕적인 내용 이외에 강제라는 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순자의 예론은 전국 말기의 현실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이 등장한 신 지주층과 상인 계층의 이해관계와 그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사활적인 패권 경쟁을 치르고 있는 패자들에게 왕도王道와 인정仁政은 고매하기는 하지만 너무나 우원迂遠한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전국戰國 통일의 기틀을 닦은 재상으로 유명한 상앙商?이 진秦나라 효공孝公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상앙이 왕도를 개진하는 동안 줄곧 졸고 있던 효공이 패도覇道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벌떡 일어나 다가앉아 경청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맹자』 편에서 읽었습니다만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을 때, 왕이 제일 먼저 주문한 것이 바로 “당신은 어떻게 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소?”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의仁義의 정치론은 이미 공자 당시부터 제후들의 관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겐 유가의 주장이 그야말로 “공자 맹자 같은 소리”였습니다. 공자의 주유周遊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지요. 유가는 당시의 제후들에게는 왕도를 표방하는 장식적 의미 정도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논어』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유가는 그들의 사상에 만세의 목탁이라는 초역사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이 점에서 현실론으로 기울어버린 순자는 이단으로 매도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논자에 따라서는 순자의 이러한 현실론에 대해 유가의 발전이라는 긍정적 평가를 내리기도 합니다. 맹자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초도덕적 가치를 지향하고 천명론이라는 종교적 편향을 보였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보수적이었다고 평가됩니다. 이에 반하여 순자는 사회적 통제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천명을 비판하고 관념적 잔재를 떨어버렸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순자 사상은 실제로 유가의 예치禮治 사상으로부터 법가의 법치法治 사상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순자의 제자 중에서 한비와 이사 등과 같은 유명한 법가가 배출되었다는 것도 이러한 성격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순자 사상은 현실 인식과 인간 이해에 있어서 냉정한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그러한 냉정함을 바탕으로 전통적 관념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명하게 단절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순자의 냉정함은 그의 문장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순자의 문장은 화려한 수사보다는 뜻의 창달暢達에 주안을 두었으며, 논설 기능을 가일층 발전시켜 논리가 정연하고 주장이 분명한 위에 전체적인 구성에도 짜임새가 있는 것으로 정평을 얻고 있습니다. 특히 「천론」天論, 「성악」性惡 두 편은 고대 논설문의 규범이 되어 이후의 논설문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순자의 예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를 곧 법과 제도의 의미로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론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순자의 인문 철학이 이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란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는 대목입니다. 굳이 이 글의 뜻을 부연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의 내용을 물질적 욕망의 충족과 규제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순자는 법학적·경제학적 의미만으로 예를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욕구가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대단히 탁월한 인문 철학입니다. 순자가 단순한 법치주의자나 제도주의자가 아니라 뛰어난 인문 철학자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순자가 예론과 함께 교육론을 개진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이러한 인문 철학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바와 같이 순자의 예론의 기본적 내용은 법과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 법과 제도가 안정적으로 작동케 하기 위해서 교육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도량度量과 분계分界가 안정적으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교육에 의하여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이 순자의 교육론입니다. 순자는 이미 사람은 예의와 분계를 인식할 수 있는 지知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할 능력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매우 긍정적인 인간관을 피력해두고 있습니다.



   나무는 먹줄을 받아 바르게 됩니다

   君子曰 學不可以已 靑取之於藍 而靑於藍 氷水爲之 而寒於水
   木直中繩 輮以爲輪 其曲中規 雖有槁暴 不復挺者 輮使之然也 故木受繩則直 金就礪則利
   君子 博學而日參省乎己 則知明而行無過矣 故不登高山 不知天之高也
   不臨深谿 不知地之厚也 不聞先王之遺言 不知學問之大也        
   ―「勸學」

   처음의 ‘군자왈’君子曰의 군자는 순자荀子와 같은 뜻으로 읽습니다. “군자가 말한다”로번역하지 않고 대체로 “나는 말한다”로 읽습니다.

   나는 말한다. 학문이란 중지할 수 없는 것이다. 푸른색은 쪽에서 뽑은 것이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 먹줄
   을 받아 곧은 나무도 그것을 구부려서 둥근 바퀴로 만들면 컴퍼스로
   그린 듯 둥글다. 비록 땡볕에 말리더라도 다시 펴지지 않는 까닭은 단
   단히 구부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게
   되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군자는 널리 배우고 날
   마다 거듭 스스로를 반성하면 슬기는 밝아지고 행실은 허물이 없어지
   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줄 알
   지 못하고 깊은 골짜기에 가보지 않으면 땅이 두꺼운 줄 알지 못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선비는 선왕의 가르침을 공부하지 않으면 학문
   의 위대함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장은 여러분에게도 매우 귀에 익은 것입니다. 『순자』 「권학」편勸學篇의 첫 구절입니다. 유명한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출전이기도 하지요. 학습과 교화를 강조한 교육철학의 선언입니다. 곧은 나무를 휘어서 바퀴가 되게 하는 것을 유퓔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그리고 바퀴가 예전처럼 다시 펴지지 않는 것도 이 유의 효과입니다. 나무를 곧게 만드는 것도 교육이며 쇠를 날카롭게 벼리는 것도 교육의 역할입니다.
순자의 체계에 있어서 인간 사회의 문화적 소산은 사회 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회 조직이 바로 예禮입니다. 그리고 그 예가 곧 제도와 법입니다. 이러한 제도와 법을 준수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이 이러한 제도와 법이 안정적으로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지요. 더 푸르게 만들기도 하고, 둥글게 만들거나 곧게 만들기도 하고, 날카롭게 벼리기도 하는 것, 이것이 교육입니다.

   순자가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첫째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욕구 충족이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성악적 측면이 순자의 교육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으며, 성인이나 폭군이나 군자나 소인이나 그 본성은 같은 것이며,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인간관이 되고 있습니다(凡人之性 堯舜之與桀跖 其性一也 君子之與小人 其性一也 塗之人可以爲禹: 「性惡」).

   인간에게 선단善端은 없지만 인간은 인仁·의義·법法·정正을 알 수 있는 지知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교화될 수 있으며 또 교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순자의 교육학이며 사회학입니다. 순자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까닭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다음 예시문은 순자의 교육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글입니다.

   蓬生麻中 不扶而直 白沙在涅 與之俱黑        ―「勸學」
   쑥이 삼 속에서 자라면 부축하지 않아도 곧게 되고 흰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함께 검   어진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교육에 있어서 환경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자』의 이 구절은 일반적인 교육 환경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제도와 규범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순자가 맹자에 비하여 인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순자는 예禮, 즉 제도의 의미를 높게 평가함으로써 오히려 맹자에 비하여 문화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순자의 인문 사상이며 발전사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유가가 치인治人에 앞서서 수기修己를 요구합니다. 이 경우의 치인이 순자의 체계에서는 예禮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순자는 수기보다는 치인을 앞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수양에 앞서 제도의 합리성과 사회적 정의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성은 선천적인 것도 아니며 개인의 수양의 결과물도 아니며 오로지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순자는 개량주의적이기보다는 개혁주의적입니다. 훌륭한 규범과 제도가 사람을 착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도덕성의 근원을 인간의 본성에서 찾는 맹자가 주정주의主情主義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사회 제도에서 찾는 순자는 주지주의主知主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순자의 이와 같은 진보적이고 신선한 관점이 매우 놀라우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논의와 비교해보더라도 그 선도鮮度가 떨어지는 점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충격인 것은 그에게 일관되고 있는 것이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사실입니다. 순자를 성악설의 주창자로만 알고 있던 우리들로서는 매우 당혹스러울 정도의 새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보다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에게서 훨씬 더 깊이 있는 인간주의를 발견하는 것이지요.

   순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도人道와 인심人心입니다. 천도天道와 천심天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순자의 도는 천지의 도(天地之道)가 아니라 사람의 도(人之所道)일 뿐입니다. 순자의 이론에는 또한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그는 성인聖人이라면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군자는 자기의 내부에 있는 것을 공경할 뿐이며, 하늘에 있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순자의 이와 같은 인간주의와 인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인간주의가 감상적으로 피력되지 않고 냉정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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