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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사전 290쪽

   나의 동양고전 공부에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감옥에서 함께 고생하셨던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 선생님입니다. 노촌 선생님은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분입니다. 작고하신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박사와 동학 고우로 학문적으로 같은 반열에 드시는 한학漢學의 대가입니다. 이 노촌 선생님과 내가 같은 감방에서 무려 4년 이상을 함께 지내게 됩니다. 같은 방에서 하루 24시간을 4년 이상 함께 지냈다는 것은 내겐 대단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노촌 선생님에 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간단히 소개하자면 최근에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라는 책을 출간하시기도 하였고, 노촌 선생님의 일대기가 KBS의 <인물현대사>에서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노촌 선생님으로부터 내가 배우고 깨달은 것이 동양고전에 국한된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생각하면 노촌 선생님과 한방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깥에 있었더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노촌 선생님의 삶은 어쩌면 우리의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선 봉건 사회, 일제 식민지 사회, 전쟁, 북한 사회주의 사회, 20여 년의 감옥 사회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를 두루 살아오신 분입니다. 한 개인의 삶에 그 시대의 양量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삶의 정직성을 판별하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노촌 선생님은 참으로 정직한 삶을 사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촌 선생님의 삶은 어느 것 하나 당대의 절절한 애환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중의 한 가지를 예로 들자면 노촌 선생님을 검거한 형사가 일제 때 노촌 선생님을 검거했던 바로 그 형사였다는 사실이지요.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일파들이 오히려 반민특위를 역습하여 해체시켰던 해방 정국의 실상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지요.

   노촌 선생님께서는 옥중에 계시는 동안 가전家傳되던 의병 문헌을 들여와 번역을 하셨고 나는 자연스럽게 옆에서 번역 일을 도우면서 한문 공부를 하기도 하였지요. 그때 번역한 초고가 출소하신 후인 1993년 10월에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내가 그 엄청난 동양고전을 비교적 진보적 시각에서 선별하여 읽을 수 있었던 것이나 모르는 구절을 새겨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노촌 선생님이 옆에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때 공감되는 부분이나 앞으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표시해두었습니다. 지금 여러분과 같이 공부하고자 하는 예시 문안의 대부분이 그때 표시해두었던 부분인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게 될 동양고전 강독은 사실 감옥에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촌 선생님의 생각이 간접적으로 전승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노촌 선생님의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서 선생님의 일대기인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에 발문을 썼는데, 그 끝부분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노촌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음을 뉘우치게 된다. 그러나 조금도 적조한 느낌을 갖지 않고 있다. 문득 문득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국어사전을 찾을 때면 일부러라도 290쪽을 펼쳐 본다. 국어사전 290쪽은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숨겨놓는 책갈피이다.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 빌려 쓰면서도 무심하다가 언젠가 왜 하필 290쪽에다 숨겨두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290’이 바로 ‘이구영’이라고 답변하셨다. 엄혹한 옥방에서 바늘 하나를 간수하시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여유이면서 유연함이었다.

지금도 물론 나의 가까이에 국어사전이 있고 자주 사전을 찾고 있다. 찾을 때면 290쪽을 열어 보고 그 시절의 노촌 선생님을 만나뵙고 있다. 다시 한 번 이 책의 출간을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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