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비로 다 내렸기 때문인지 눈이 인색한 겨울이었습니다 눈이 내리면 눈 뒤끝의 매서운 추위는 죄다 우리가 입어야 하는데도 눈 한번 찐하게 안 오나 젊은 친구들 기다려쌓더니 얼마 전 사흘 내리 눈 내리는 날 기어이 운동장 구석에 눈사람 하나 세웠습니다 옥뜰에 서 있는 눈사람. 연탄조각으로 가슴에 박은 글귀가 섬뜩합니다.
나는 걷고 싶다
있으면서도 걷지 못하는 우리들의 다리를 깨닫게 하는 그 글귀는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이마를 때립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 서예작품집『손잡고더불어』1995년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 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하여 키우는 '부당한 증오'는 비단 여름 ...
당신네들 하늘을 나는 저 새를 보시오 저 새가 오른쪽 날개로만 날고 있소? 왼쪽 날개가 있고 그것이 오른쪽 날개만큼 크기 때문에 저렇게 멋있게 날 수 있는 것이오. 나는 뉴스를 보면서 잭슨 말 한 번 잘한다고 감탄했다 右(우)라는 것을 무슨 신성한 것인 양 받들어 모시는 사람들이 아무 대꾸도 못하고 나는 새만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그 새에는 두 개의 날개가 있었다.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다. 그리고 그 두 개의 날개는 멀어서 자로 잴 수는 없었지만 나의 눈에는 그 모양의 크기가 꼭 같아 보였다. 인간보다 못한 금수의 하나인 새들조차 왼쪽날개(左翼)와 오른쪽날개(右翼)를 아울러 가지고 시원스럽게 하늘을 날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우주와 생물의 생존의 원리가 아닐까? 왼쪽 날개로만 날아다니는 새를 보고 싶다. 마찬가지로 오른쪽 날개 하나로 날아 다니는 새를 보고 싶다. 그런 외날개 새를 한 번 볼 수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만 같다. 인류가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쳐 창조한 지식과 축적한 경험은 정치나 이념적으로 말해도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하고 무쌍하다. 그리고 그 사이는 끝없이 풍부하다. '우'의 극단에 서면 ...
새벽 두시 김밥을 먹는다 피멍든 몸을 떨어가며 갈라터진 혓바닥에 침 적셔가며 안기부 지하밀실 야식을 먹는다 방금까지
비명 터진던 고문장에서 목메인 김밥을 씹어먹는다 마른버짐 볼에 핀 어린날이었던가 소풍 가서 먹었지 달디단 그 김밥
잔업 때 억지로 삼키던 팍팍한 매점 김밥 지난 여름이었지 울산 가는 기차를 타고 아영이랑 나눠 먹던 그리운 김치김밥
앞으로 아홉밤- 살아나가자 기어코 이겨서 이 참혹한 고문의 밤을 끝끝내 뚫고 떳떳한 목숨으로 살아 나가자
아 만약 나 살아 나간다면 언젠가 어느날인가 햇살 온몸에 다시 받는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김밥을 싸들고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가보리라 가서 들꽃처럼 정결한 웃음에 젖어 촉촉한 눈물의 김밥을 먹으리라 술냄새 풍기는
건장한 고문자들에 싸여 군복에 검정고무신 신고 짐승처럼 떨며 꾸역꾸역 모멸찬 김밥을 먹는다 안기부 지하밀실 고무장,잠시 후
시작될 처절한 공포의 순간들을 씹으며 피맺힌 적개심으로 씹으며 새벽 두시 눈물의 김밥을 먹는다
박노해의 詩 눈물의 김밥을 쓰다
- 서예작품집『손잡고더불어』1995년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 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 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 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 주질 못하였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줏병을 비우고
정 형이 부탁한 산재 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 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 상가처럼
외국 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 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
有脚陽春(유각양춘) - 서예작품집『손잡고더불어』1995년 다리가 달린 따뜻한 봄 宋璟愛民恤物朝野歸美 時人咸謂璟爲有脚陽春 言所至之處 如陽春煦物也(開元天寶遺事) 송경(唐 宰相)은 백성을 사랑하고 물건을 아껴 온 나라의 풍속이 아름답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일컫기를 송경은 다리가 달린 따뜻한 봄이다. 그가 가는 곳마다 봄볕이 만물을 포근히 감싸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