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대상 게시판

청구회추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나무야
더불어숲
강의
변방을 찾아서
처음처럼
이미지 클릭하면 저서를 보실 수 있습니다.

숲속의소리

댓글 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2006년 가을, 다시 망월동에 다녀왔다. 작년 오월의 금남로와 망월동은 간데없고 오늘의 금남로와 망월동은 이미 오늘다웠다. 망월동에 즐비한 것은 당연히 무덤이었다. 끝내 시신을 찾지 못해 단지 비석만을 세워둔 곳도 있었다. 그 비석들 뒷면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장하다, 내 딸아! 역사의 진실을 위해 너는 자랑스럽게 갔구나.", "무수한 나날 너를 찾고 기다리다 이제는 단념하고 널 내 가슴 속에 묻는다." 나이들은 열셋, 열다섯, 열여덟이었다. 사진 속에서 앳된 교복차림 단발머리 여중생이 어색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망월동 구묘역 즐비한 무덤가에서 나는 결국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진하게 느꼈다. 저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 비록 그날 나는 아무 생각 없는 국민학교 1학년이었을 뿐이지만, 어쨌든 내 눈 앞에 열지어 선 이 비석들과 유리곽들과 사진들과 시든 백합이며 국화떨기 앞에서 나는 생생히 살아 쌕쌕 숨을 쉬고 있었다. 가끔 생각한다, 도청에서 끝내 도망치지 않고 남아 총탄에 쓰러져갔던 그 사람들이 그 새벽녘에 도무지 무슨 심정이었으며 어떤 생각이었는지. 나는 결코 알지 못한다. 필연코 패배할 것이라는, 당연히 죽을 것이라는 그 객관적 사실 앞에서 그들은 가지 않았고 자리를 지켰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일이 끝난 후에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란 아주 쉽다. 너무 쉽다.

누추한 화승총으로는 미국과 전쟁을 하는 '대일본제국'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잘 알았지만 그래도 그 자리를 지킨 만주벌판의 사람들, 제아무리 어깨걸고 거리를 질주한댔자 저 막강한 유신정권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면서도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청년들, 내가 던지는 한 병의 신나가 학살자를 처단할 수는 없을 테지만 닭장차에 들려올려지는 순간까지도 '파쇼타도'를 외쳤던 그 젊음들, 노동조합을 탈퇴하지 않으면 정말로 짤릴 것을 잘 알면서도 끝내 조합원 자리를 지켰던 선생님들, 그들도 모두, 끝내 밝아오는 신새벽에 "엄니, 저는 갑니다" 하며 카빈소총을 놓지 않았던 그날의 '폭도'들이었다.

내가 많이 좋아하는 누나는 스스로 '패배주의자'라고 자칭한다. 나는 갸웃했었다. '패배'라니? 아니, 그러면서도 그렇게 열심히 싸우나? 그러나 패배주의자는 싸운다. 이기고자 싸우는 패배주의자의 싸움은, 이기지 못한다고 물러서는 싸움이 아니다. "결국 이길 수 있는지"를 셈하는 자는 아직 투사가 아니다. 질게 뻔한 싸움에서 싸우지 않을 수 없어 "씨발, 그래도 나는 싸울 거다"라며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들 모두 이 땅에 '아름다운 패배주의자들'이다.

나는 누나에게 진심으로 물었다. "그럼 뭐하나? 세상은 어차피 안 바뀌는데" 누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안 바뀌지, 안 바뀌는데, 나도 그거 잘 알아, 하지만 말야, 그렇다고 저쪽을 인정할 수는 없거든, 이기든 지든 간에 적어도 승인해주고 지지해줄 수는 없는 거니까, 왜 싸우냐고? 간단해, 싸우지 않을 수 없어서야, 도저히 그냥 닥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냥 침묵하고 못본체 하는 건 공범자고 동조자고 아무튼 그렇게는 살 수 없는 거니까, 그렇게 살면 차라리 무참하게 지는 것보다도 더 비참하고 죽을 맛이니까, 내게 운동은 이제 '실존의 문제'거든.

즐비한 무덤들 속에서 나는 그렇게 생생히 살아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오월이 아닌 오늘의 망월동은 한산했다. 부스럭거리는 풀잎들이 따가운 가을햇살 속에서 서로를 비벼대고 있었다. 나는 침묵의 망월동 한 가운데서 그저 닥치고 서 있을 뿐이었다. 같이 간 친한 동생에게 우두커니 말했다. "사람은 말이야, 잘 죽을려고 사는 거야." 난 다시 울먹울먹했다. 동생에게 창피한 게 아니라 나한테 내가 너무 쪽팔려서 여기 무덤 속에 드러누운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도 쪽팔려서 동생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나보다 아홉살 어린 동생이 가만히 내 등을 만져주었다.

성미산학교에서 내가 가르치는 아이 중에 '김꽃분'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예쁜 친구가 있다. 공교육 셈으로 하면 중3인데 성미산학교에서는 9학년이라고 부른다. 고등부 과정이 없는 성미산학교에서 꽃분이는 제일 큰 언니다. 그 꽃분이가 언젠가 수업시간에 자기 엄마 책이 나온다고 했다. 나는 무슨 책이냐 물었고 꽃분이는 우물쭈물했는데 그건 엄마 책이 뭔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냥 자세히 설명하기는 싫어서였다. 암튼 나는 진도를 나가야 했고 그날 그냥 멋지시다고만 말했다.

오늘 한겨레 하단 광고에 <꽃분엄마 파이팅!>이라는 책 제목을 봤을 때도 이 꽃분이가 그 꽃분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꽃분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또 있구나, 하는 느낌으로 나는 그 지면을 휙 넘겼다. 성미산학교의 교사회의가 끝나고 뒤풀이로 꽃분이 엄마의 행사장에 가자는 결정이 나고서야 나는 그 꽃분이가 그 꽃분이였으며 내가 언젠가 읽었던 오마이뉴스의 그 연재만화가 그 꽃분이 엄마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았다. 행사장에 도착해 꽃분이의 원판인, 정말 예쁘신 꽃분이 어머님께 저자싸인을 받았다. "조진호님 파이팅! 꽃분엄마 이은하 2006. 9. 28."

만화책 <꽃분엄마 파이팅!>은 펼친 쪽마다 가슴 뭉클한 책이다. 바야흐로 한국 아줌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화다. 무능력한 대학원생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어린 딸을 둔 엄마는 집집마다 초인종을 누르며 책외판원을 한다. 힘겨운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어이없는 해프닝들은 쓰라린 미소로 남는다. 이렇게 일상의 섬세한 감성과 순간포착의 세밀화가 읽는 이의 눈길을 도무지 놔줄 줄 모른다. 가슴 아린 갖가지 삶의 풍경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내 눈은 이미 젖는다. 삶이란, 그래, 이런 것이지.

김수영의 시, <나의 가족>에는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김수영은 끝내 일상의 순간들로부터 자신의 시어를 떼어내지 못한다. 가장 사소한 것이 가장 날카롭다. 꼭 김수영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아니, 위대한 것은 사실 사소한 것에서 묻어난다. 누구도 우주의 탄생을 본 일이 없고, 누구도 태양에 가본 적 없어도 과학자들은 사소한 자연상태를 면밀하게 관찰해 우주의 연대기와 태양의 운동법칙을 그려낸다. 위대한 것은 사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 앞에서 나는 내 삶을 발견했다. 왜소하고 비루하며 누추하고 초라한 삶이었다. 그러나 정작 <꽃분엄마>는 그 삶을 담담하게 그려대고 들려준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다시 돌아 내 삶, 네 삶, 모두의 삶 속에 있다. 당당하게 있다. 자랑스럽게 있는 것이다. 김수영이니 신동엽이니 김정한이니 리영희니 신영복이니 이오덕이니 프레이리니 법정이니 들뢰즈니 꽃분엄마니 알고보면 다 같은 얘기다.

못이겨도 상관 없다는, 실존으로서의 운동, 삶으로서의 운동은 그렇게 꽃분엄마의 삶 속에서 겨우겨우 말하여진다. 알고보면 너나 나나 다들 그렇게들 살고 있는 것,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그래, 망월동은 망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굳이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까지 내려가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 날마다 골목마다 전사들은 내게 묻는다. 아니, 전사들의 죽음 앞에서 내가 나한테 묻는다. 그들을 기억하는 한 아직 내 앞에 무수히 남아 있을 저 쪽팔림의 나날들. 그러나 그 쪽팔림의 힘이 끝끝내 나를 구원하리라.

질문들은 무수히 돋아나 가시면류관이 되어 내 뇌리를 파고 들고, 역겨운 나날의 힘빠지는 풍경들은 도처에서 나를 포위하고 있다. 도무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어둠의 세상,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나의 오늘, 끝없이 추락하는 이 세기의 구슬픈 전망과 잔인하게 유린당하는 진실의 주검들, 하지만 삶은 지속된다.

이번 주말에는 평택 대추리에 다녀올 생각이다. 거기서 지금 이 순간에도 싱싱하게 싸우고 있는 후배들에게 더 이상 쪽팔려서 가지 않을 수가 없다. 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마주 앉아 같이 술마시고 기타치고 노래하고 하는 겨우 그런 일뿐이다. 며칠전 거기서 싸우다가 평화대행진 때문에 서울에 들른 한 후배에게 물었다. 후배는 대답했다. 저는 운동하는 거 아녜요. 그냥 그 분들이랑 같이 사는 거예요. 나는 다시 신발코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냥 같이 사는 거다. 평택지킴이들이 이길 수 있을까? 미군이 이 땅에서 나갈까? 이제는 주민들도 거의 떠나버린 대추리와 도두리의 들녘에서 일평생 농사밖에 모르고 살아오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그 땅이 다시 되돌아올까? 하지만 삶은 지속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3225 한국 교육,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다. 2 정해찬 2008.10.09
3224 한결이에게 쓰는 편지 6 유천 2007.12.19
3223 한겨레신문 8월13일 광고 나무에게 2008.08.19
3222 한겨레 신문을 보다가... 3 류지형 2008.05.15
3221 한 해가 시작되며 7분 선생님들의 복직도 이뤄지길 바라며 레인메이커 2010.01.01
3220 한 층 더 오르다~ 8 배기표 2011.12.01
3219 한 어린나무의 궁금증.... 4 김인석 2003.05.13
3218 한 번만 더 올립니다 2 신복희 2006.12.29
3217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석삼 2004.02.06
3216 한 개의 송곳니 2 함박웃음 2006.12.03
3215 학부모님들과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레인메이커 2005.03.16
3214 학교를 위한 군사학 세례를 받고.. (생각이 다른 당신과 마주서며) 레인메이커 2003.07.09
3213 학교를 `학생을 위한 학생에 의한 학생의 것’으로 돌려줘야 한다(한겨레신문 시평) 주중연 2003.03.09
3212 학교로부터의 사색 17 정연경 2003.03.07
3211 학교는 왜 다닐까 (아이들의 눈과 마음으로) 3 레인메이커 2003.06.28
3210 학교 선생님들께 1 김정아 2009.06.19
» 하지만 삶은 지속된다 4 함박웃음 2006.09.29
3208 하승창의 신영복 인터뷰(서예관련부분) 김성장 2007.11.05
3207 하방연대에 대한 생각 20 조재호 2006.09.16
3206 하루를 일찍 열어가려 했던 처음 그 마음으로... 3 레인메이커 2003.06.02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 167 Next ›
/ 167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