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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3.09.13 17:14

태풍 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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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안녕?'이라는 말이 있다. 우스개로 자주 쓰던 그 인사가 어젯밤의 나에게는 더없이 어울리는 말이었다. 태풍 '매미'가 온다고 해도 그 위력에는 신경쓰지 않고 매미라는 이름이 우리말인지 외국어인지 그것이 궁금하기만 했다.
  
안방에서는 태풍이 경상도 지방에 상륙했다는 뉴스가 전해지고 있는 시각에 나는 내 방에서 원고를 쓰고 있었다. 지역신문에 나가는 칼럼을 하나 맡았는데 요즘은 그 일에 너무 욕심을 부리느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다. 어제도 밤늦도록 깨어 있었지만 글 쓰느라 그토록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지 못했다. 남편은 혼자 부산하게 태풍에 대비한다고 마당을 오가고 있었으나 나는 그것도 몰랐다. 열한 시가 가까워 올 무렵에 남편은 나를 부르더니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챙겨서 나오라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제야 나는 깜짝 놀라 마루에 나서니 마당에 가득한 황톳물이 보였다. 마루 밑에 있던 신발들이 물 위에 나뭇잎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엄마야! 내 신발 떠내려간다."
  "그건 괜찮다. 내가 또 사 줄게. 가방 들고 빨리 나오는 게 낫겠다."
  
남편이 나를 안심시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전이 되어 마을 전체는 암흑 속에 갇혔다.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다.

나는 방으로 들어와서 켜놓았던 컴퓨터를 껐다. 그리고 남편에게 내 원고가 들어있는 컴이니까 높은 곳에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어둠속에서 남편이 컴퓨터를 높은 곳에 올리고 있었으나 그래도 미덥지 않아서 원고를 복사해놓은 디스켓을 있는대로 큰 가방에 다 쏟아 넣었다. 그리고 집문서와 또 다른 증서들을 챙기고 '꽃무늬 저고리'책 표제 원본인 선생님의 글씨를 찾아서 물이 스미지 않는 가방에 따로 넣었다. 그러고는 또 뭘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다가 아이들의 사진이 든 앨범을 가방에 넣었다.
  
그런 물건을 챙긴 가방은 두 개나 되었다. 내가 모자 달린 점프를 입고 마루에서 내려오니 갇혔던 물이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너무 놀라 나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떨리는 손으로 나는 가방을 들고 남편은 두려워서 울고 있는 강아지를 안고 집을 나섰다. 골목으로 나가니 내려가는 물살이 어찌나 센지 금방 휩쓸려 갈 것 같았다. 깜깜한 골목을 지나 큰길에 오르니 개울물이 곧 넘칠 듯이 불어 세찬 파도가 일어 울렁이며 흘렀다. 개울 곁에는 바람에 쓰러진 고목이 전장에서 총상을 입은 병사처럼 뒤척이고 있었다. 길가에 주차되었던 승용차가 물살에 밀려 고무보트처럼 둥둥 떠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랜턴을 든 남자들이 골짜기 위로 가라고 안내해 주었다. 내 생각에는 문명의 불을 깜빡이는 읍내 가까이 가야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쪽으로 가라니 겁이 덜컥 났다. 고립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쳤다.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이 울었다. 오빠였다.
  
  "희야 너그집은 괜찮나?"
  "안 괜찮아, 오빠. 헬기 보내줘."(급하면 존댓말은 없다)
  "그기 뭐꼬?" (너무나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이라 알아듣지 못했다고  나중에 설명했음)
  "헬기 몰라? 잠자리 비행기!! 사람 구조하는......"
  "그렇게 심각하나?"
  "몰라, 우리 지금 피난 가는 중이야."
  "알겠다. 너무 놀래지 말고 침착해라이. 내 지금 그리 갈게."
  "오빠 오지말고 헬기나 보내줘."
  
전화를 끊고 나니 다시 동생들이 줄줄이 전화벨을 울리며 문명의 힘에 기대어 염려하는 마음을 보내왔다.
  
  "누나, 집은 비 피해 없..."
  "몰라몰라, 오빠한테 들어봐. 나 지금 피난 가는 중이야."
  
동생들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전화를 먼저 끊고는 높은 지대로 향해 걸었다. 물살은 더 세져서 내 엉덩이까지 적셨다. 가까스로 더듬듯 걷노라니 아롱이는 불빛이 보였다. 절간이었다. 거기엔 벌써 먼저 피난 온 사람들이 촛불을 켜놓고 추위에 떨며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집에서 절까지 걷는 그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이 다 지나갔다. 우리 아이들이 집에 없으니 다행이라는 것과 정말 우리집이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것, 비가 점점 더 많이 와서 지붕 위에서 고립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내 엉덩이까지 적신 물에는 낮에 길에서 보았던 개똥도 섞여 있을 거라는 칩칩함, 집에 두고 온 물건들 가운데 아까운 것이 무언지 차례대로 떠올렸다. 그런 순간에 그토록 자잘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나 고마운 물을 왜 수마(水魔)라고도 하는지 완전히 이해했다.      
  
절 마당에는 물이 잘 빠졌다. 많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잠자리에 들 생각은 않고 모두 마루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남편은 나를 혼자 두고 마을을 살핀다고 다시 내려갔다.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세찬 빗줄기가 숨을 몰아 쉬듯 후두둑 잦아들더니 가느런 빗방울이 되어 나뭇잎을 쓰다듬었다. 고목을 쓰러뜨린 바람도 선들바람으로 변했다. 남편이 나를 데리러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집안으로 들어오니 마당을 채우던 물이 이젠 발목도 적시지 못했다. 그 많던 물이 어디로 빠졌는지 궁금했다. 다행히 집안은 있던 그대로 잠잠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뒷집 아저씨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소리를 지르며 마당에 갇힌 물을 퍼내었다. 남편이 얼른 달려가서 도왔다. 오빠가 다시 전화를 해서 읍내까지 왔으나 우리집 들어오는 길목이 봉쇄되어 더 이상 오지 못한다고 전했다. 나는 너무 지쳐 젖은 옷만 갈아입고는 강아지와 함께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물난리 경험은 한 시간도 못 채우고 끝나버린 것이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니 텔레비전 중계로 보았던 수해지역 현장이 내 눈앞에 생방송 되고 있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담이 완전히 무너진 집에는 물에 젖은 이불과 옷가지가 마당에 쌓여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집들이 방안까지 물이 들었다고 했다. 큰길에는 읍사무소 직원들이 나와서 복구작업을 돕고 있었다. 어젯밤 무섭게 넘실대던 개울물은 바닥만 덮는 가는 물줄기로 변해 흐르며 지금 마을에 저질러 놓은 일은 저랑 아무 상관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었다.
  
점심을 먹고서야 어젯밤 뒷집 아저씨가 왜 그토록 화를 내었는지 알았다. 이제껏 70평생을 살아도 이 마을에 물이 덮치기는 어제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시내에서 이사온 어떤 사람이 자기네 비닐하우스의 농작물을 살리려고 하우스 사이를 돌아 개울로 빠지는 도랑을 막았는데 그것이 허물어지면서 들판 가득 갇혔던 물이 마을 쪽으로 쏟아져 큰일날 뻔했다고 한다. 다행인 것은 그 사실을 알고 뒷집 아저씨가 물줄기를 터 주어서 아주 큰 피해는 없었던 것이다.
  
지금 온 마을에 상처를 남기고 간 수마는 도시에서 온 한 사람이 이기적인 마음에 자연을 거슬러 생긴 실수였다. 서울에서 이사온 나는 나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동안 토박이 어른들은 물줄기를 바로 잡고 마을 전체를 위해서 협력해 피해를 줄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장본인과 우리 세 사람은 아는 일이다. 그는 그래놓고도 오늘 아침 읍사무소 직원에게 하우스 보상문제로 언성을 높였다. 언제나 도시와 도시인이 문제인가?
  
덕분에 나는 그 정도 비에 놀라서 도망가며 헬기까지 찾았던 해프닝은 또 두고두고 동생들에게 놀림감이 될 것 같다. 또한 내가 평소 무엇을 소중히 생각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어젯밤 가방에 급히 넣은 물건들을 꺼내면서 내 자신을 깊이 응시하며 정돈했다.

P.S 수재의연금 보내도 괜찮습니다.
      거 20년 전에 입던 그런 옷 같은 것 말고
      현금만 접수합니다.
      묵직한 수표면 특히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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