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대상 게시판

청구회추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나무야
더불어숲
강의
변방을 찾아서
처음처럼
이미지 클릭하면 저서를 보실 수 있습니다.

숲속의소리

2003.07.15 12:32

우리 오빠

댓글 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오빠처럼 든든한 기업이 되겠습니다.'
언젠가 본 광고문이다. 텔레비전 화면에, 한 소년이 어린 여동생을 업고 물살 세게 흐르는 개울을 건너는 장면이 지나가자 나온 광고글귀다. 가슴 뭉클한 감동이 일어나는 광고였다. 그래, 그랬다. 나에게도 오빠는 튼튼한 울타리처럼 든든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렇게 오빠 등에 업혀서 개울을 건넌 일이 몇 번이나 되는지 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 외갓집에서 방학을 보낼 때, 징검다리로 건너던 개울에 물이 불어나는 날이면 오빠는 겁 많은 나를 업고 개울을 건너 주었다. 그런 오빠를 나는 언제나 따라다녔다. 연날리기를 하든 팽이치기를 하든 썰매를 타든 항상 오빠 곁에 있었다. 우리 오빠가 동네에서 제일 크고 멋진 연을 만들어 가장 멀리 날리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온 동네 아이들 구슬이나 딱지 팽이 따위를 다 딸 때까지 놀이를 그치지 않는 오빠 곁에서 날이 저물도록 함께 있었다.

어느날인가 오빠의 기분이 좋은 날이면 우리 집 광에 쌓여 있는 구슬이나 팽이 같은 물건들을 원래 주인이었던 친구들에게 돌려주면서 선심을 쓰면 나는 덩달아 뽐내며 아이들을 불러 나누어주곤 했다. 나이 겨우 나보다 세 살 많은 오빠인데 내 눈에는 항상 어른 같았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오빠 앞에서 울기부터 했다. 그러면 오빠는 참을성을 가지고 우는 나를 달래며 하나하나 물어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어 해결해 주었다. 가끔 심술이 나면 나를 보고 못생겼다고 놀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정할 때가 많았다.

우리 오빠는 뭐든 잘했다. 그림도 잘 그렸고 노래도 잘 불렀고 운동도 잘 했다. 특히 하모니카는 최고였다. 여름밤이면 마당에 펴놓은 평상에 앉아 소리 좋은 '옥타브 하모니카'로 아는 동요를 차례로 불면 잠든 별마저 깨어나는 듯 눈부시게 반짝였다. 내가 곁에 누워서 작은 소리로 노래를 가만가만 따라 부르다가 잠들면 별빛보다 고운 꿈을 꾸었다. 또한 새 학년이 되어 새 교과서를 받아오는 날이면 책 덮개를 오빠가 늘 씌워주었다. 오빠는 모아둔 묵은 달력의 매끈한 종이로 내 교과서 표지를 씌워 이름까지 직접 써주었는데 그걸 받아들면 기분이 참으로 좋았다. 다른 아이들은 주로 신문지로 책을 쌌으나 나는 언제나 새하얀 달력종이 아니면 문방구에서 새로 사온 예쁜 종이였다. 교과서 귀퉁이 접히는 부분마다 정확히 45도 각도가 되도록 씌운 덮개는 어찌나 반듯했던지 한 학기가 다 가도록 단정하게 책표지를 싸고도 깨끗하게 남았다.

오빠는 장남이라고 집안의 모든 위함의 중심이 되어 자랐지만 나와 동생들은 그마저도 당연하다고 여겼다. 나는 철이 들면서도 그런 오빠가 최고인 줄만 알았다. 반드시 높은 사람이 되거나 큰부자가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내가 30대에 들어서면서 오빠는 자랑이 아니라 내 근심이 되었다. 욕심 많았던 오빠를 좌절하게 한 벽은 '연좌제'라는 무서운 제도였다. 20대를 방황으로 보내고 검정양복 입은 사람들에게 끌려 다녔던 30대는 술로 낭비했다. 최고라고 믿었던 오빠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부모님 몰래 눈물을 흘리며 도움이 되려고 애썼다. 그러나 오빠가 마흔에 접어들자 마음먹고 일을 하니 누구보다 빨리 발전했다. 오빠는 다시 나에게 자랑이 되었다. 누가 뭐라든 나에게는 그랬다.

이제 서울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내려오니 오빠가 가까운 곳에 산다는 사실이 가장 든든하고 믿음직한 일이다. 뭐든 오빠에게 물어본다. 힘든 일이 있어도 친정어머니보다 오빠에게 먼저 전화한다. 며칠 전에는 남편과 함께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리 차가 도로 한 가운데서 멈췄다. 길 가운데에 멈춘 차를 길섶으로 밀어내는 동안 바로 곁에서 생생 달리는 자동차들이 정말 무서웠다.

차를 밀어낸 남편은 정비소에 전화했고 나는 오빠에게 전화했다. 정비사보다 오빠가 먼저 달려왔다. 나는 오빠 얼굴을 보자 또 울었다. 처음엔 내가 울고있는지 인식조차 못했으나 오빠랑 함께 온 조카가 나에게 울지 말라고 달래서 그때야 깨달았다. 그래도 오빠 앞에서는 자꾸 눈물이 났다. 오빠는 우리가 어렸을 때처럼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남편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나는 눈물을 훔쳤다. 대단히 큰 일도 아닌데 내가 어려운 상황일 때 오빠가 나타나면 어릴 때처럼 눈물이 난다.      

오늘 낮에는 미리 전화도 없이 별안간 오빠가 우리집에 왔다. 내가 직장도 그만 두고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온 것 같았다. 이사온 후 가족들과 함께 벌써 여러 번 왔으나 낮에 오빠 혼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시장이 멀다고 과일이며 빵, 고기인 듯한 것들을 양손에 잔뜩 들고 왔는데 두 식구가 먹기에는 아무래도 많아 보였다. 오빠는 마루에 앉아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시골생활이 어떤지 한마디도 묻지 않고는 가야겠다고 일어섰다. 오빠도 나도 시골이 무언지 어린 시절 외갓집을 본 것이 전부인데, 어중간한 나이에 골짜기 마을로 이사온 여동생이 뭐 그리 보기 좋았을까만은 그래도 말없이 대문을 나섰다.

앞서 걷던 오빠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나를 불렀다.
"희야!"
"예?"
"니 얼굴이 와 그리 까맣노?"
"시골 아줌마잖아요."
"그래도 너무 까맣다."
"괜찮아요."
"니는 못생겨서 얼굴마저 검으면 볼 거 하나도 업데이."
"알아요."
어릴 적처럼 놀릴 때는 오빠 볼에 보조개가 살짝 보이는 듯했으나 다시 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시 사무실에 나가거라. 자꾸 땡볕에서 일하면 정말 못난이 된다."
"......"
"또 오께."
"예."
오빠는 쓸쓸한 얼굴로 차에 올라 운전대를 잡았고 나는 집으로 들어왔다. 좁은 마당이 휑하니 넓어 보였다. 배를 탄 듯 속이 울컥하더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까짓 얼굴이야 검든 희든 무슨 상관이라고, 오빠 얼굴보고 눈물이 나려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가 시골에서 잘 지내는 게 아닌 모양이다. 나는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바우'를 얻은 조원배 선생님 축하해요.
그리고 숲속 나무님들 다들 보고 싶어요!!!
더운 여름 건강하게 지내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365 참 좋은 이웃들 1 신복희 2003.07.21
364 부평사람으로서 한마디(1) 2 정연경 2003.07.21
363 가슴이 많이 아픔니다. 3 박영섭 2003.07.19
362 더불어숲에 들어온 계기... 연꽃 2003.07.17
361 마땅한 일입니까? 소나무 2003.07.17
360 내 의식의 나무는 어떻게 가지를 뻗고 있는가? - 조정래 산문집을 읽고 2 주중연 2003.07.16
359 어디 놀고 있는 노트북, 없나요? 박경화 2003.07.16
358 뒷자리 레인메이커 2003.07.16
357 엄마의 편지 1 연꽃 2003.07.15
356 반가워요. 소나무 2003.07.15
» 우리 오빠 4 신복희 2003.07.15
354 村老의 아름다운 삶.. 5 이한창 2003.07.13
353 무엇을 좋아한다는것은.... 2 연꽃 2003.07.12
352 [내가 읽은 시] 벚꽃이 진 자리에 1 장경태 2003.07.11
351 신문 이름을 바꾼 아이들의 힘 ^^* 2 레인메이커 2003.07.11
350 해외유학이나 어학연수가려는 나무님은... 1 이승혁 2003.07.11
349 사람이 소중하다. 2 연꽃 2003.07.11
348 학교를 위한 군사학 세례를 받고.. (생각이 다른 당신과 마주서며) 레인메이커 2003.07.09
347 내 생애 첫번째 메일 1 혜영 2003.07.08
346 아첨과 기회주의 육체노동자 2003.07.08
Board Pagination ‹ Prev 1 ... 139 140 141 142 143 144 145 146 147 148 149 150 151 152 153 154 155 156 157 158 ... 167 Next ›
/ 167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