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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3.07.05 23:53

책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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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것은 병일지도 몰라.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나의 주제를 알면서도 그놈에 책에 대한 욕심은 끊을 수가 없다.

출근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교대하면서 시작되는 첫 번째 업무준비는 늘 책을 읽을 수 있는 자세를 갖추는 일이다. 책을 읽고 싶은 절박함이 그렇게 하도록 했는지 복잡한 매표실에서 손님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책을 고정시키는 나만의 책받침을 고안했다. 동료들이나 선배들은 도대체 이렇게 복잡한 신림역에서 어떻게 책을 읽을 수 있느냐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을 보이곤 한다. 나는 그러면 “이렇게 해야 편해유”하곤 하는데 사실 그렇다. 두 달전 우리 반 부역장이 새로 발령왔을 때 매표실에서 예의 책받침으로 책을 읽는 내 모습을 봤는데, 나는 누가 오든 책을 치우지 않는다.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빨리 나의 확실한 정체를 밝혀야 이후에 지내기 수월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안해서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죽을지도 몰라유”했었다. 다행히 우리 부역장도 나 못지않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역무실에 있을 때나 역 시설물을 순회할 때도 늘 책을 끼고 다니는 사람이다. 이 양반이 다른 역에 있을 때 매표실에서 신문 볼 여력 있으면 책 읽으라는 것이 자신의 생각이란다. 사실 공문에는 친절 서비스 차원에서 매표실에서 책이나 신문을 읽지 못하도록 지하철공사의 경영진이 늘 지시하는 주요 사항들이다. 그리고 내부의 감사조직을 통해 직무감찰활동을 통해 지적당하기도 하고, 징계를 받기도 했던 사례도 있다. 나의 경우도 전역에서 감사에 걸렸는데, 이 감사부 직원이 두 달 동안 손님인 체하고 지켜봤던 모양인데, 나는 매표실에서 책만 보더란다. 잘 보긴 잘 봤는데, 이게 고쳐질 일인가? 나는 여전히 책을 읽었고, 당시 우리 반의 부역장 역시 “장경태는 책 읽도록 그냥 내버려두라고 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 같으면 시정하겠다고 하거나 주의를 주도록 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 양반에게도 늘 고마움을 느낀다. 여하튼 중간간부가 경영방침을 따르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 직장생활의 풍토라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일임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터이다.

같은 직장에서 이런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인데, 술자리에서 자기도 책을 좋아하지만 젊은 사람이 그렇게 책을 읽는 것은 처음 본다면서 나를 “존경(?)”한단다. 서로의 책방을 구경가기로 약속했고, 나의 정열적인 노래에 홀딱 반해서 내가 부른 노랠 들으면 눈물이 나온다는 낭만적이고, 대단히 자유주의적이면서 합리적인 사람이다. 역시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배일도 서울지하철 노조위원장에 대해서는 똑같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혐오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은근한 동지적 의지가 되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책이 없으면 못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기억에 의하면 어른들이 책을 읽는 것은 상상도 못했고, 어머님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면 역시 책하고는 담쌓고 사는 인생을 걷고 있을 것이다. 문자의 힘과 학력이 자원이 된다는 것에 대해 눈이 트이지 못하신 우리 불쌍한 어머니는 기술을 배워 돈버는 것이 사는 것의 전부인 줄 아시는 분이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땐가 막내 삼춘이 중학교 때 읽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쥐 오줌에 너덜너덜 해진 처칠이나 링컨의 책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뭔지 모르지만 우리 아버지와는 다르고 주막에서 노름이나 하고 술주정으로 마누라나 패대는 이웃집의 아저씨들하고 다른 어른의 세계가 있을 것 같은 어떤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하긴 삼춘은 둘째삼춘이나 아버지가 얘기하는 태와는 다르게 조근 조근하면서도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태도와 겸손함 같은 것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역시 당시 내가 보았던 어른들에게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크면 우리 삼춘 같은 사람이 될 거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나의 인생은 구겨져서 자주 독립하는 삶을 살아야 했고, 따라서 먹는 것, 자는 것의 해결로 20대를 깜깜하게 보냈다. 그러다가 지하철에 들어와 사람답게 사는 길로 접어들었던 셈이다. 그게 27살이었다. 그때부터 읽고 싶은 책을 내 돈으로 사서 볼 수 있게 되었고, 다행이었는지 서초역이 첫 발령지여서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을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함께 근무하던 선배들과 책을 돌려보며 읽고는 술자리에서 책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각하면 즐겁다. 그때 지하철의 분위기라는 게 경마나 카바레출입, 빠징코, 주식 등으로 날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경태 저 자식 만나서 내가 40이 넘도록 내 돈으로 책을 한 권도 사본 일이 없는데, 책을 사서 보게 되었다”던 선배가 기억이 난다. 혼자 사는 내가 불쌍하다고 그 양반 집에 데리고 가서 형수한테 이쁜 후배라고 자랑하기도 하고, 맛있는 거 해먹이기도 했다. 그리고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나 때문에 대의원까지 하게 되었다.

그 이후 몇 몇 역을 돌아다니면서도 늘 책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만들어졌었다. 이렇게 지하철은 나에게는 참으로 좋은 일터였던 거다. 여하튼 간에 그때부터 책을 사서 갖게 되다보니 이제는 책을 보관하는 일이며 정리가 문제다. 늘 이사를 갈 때의 가장 중요 고려 사항이 책방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 가였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넓은 곳으로 넓은 곳으로 오다 보니 지금의 내가 살고 있는 곳인데, 이 역시 호박넝쿨이 이웃집을 담을 넘고, 나무 등걸을 기어오르듯 이제는 책들이 신림역의 각 매표실과 나의 사물함, 학교의 공부방, 거실과 식탁이나 텔레비전 주변, 잠자기 전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도록 이불 속이나 나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 등등 어디든지 널려있게 되었다는 거다. 저 놈의 책들을 제자리 찾아주어야 할 텐데하는 걱정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아마 내년이면 또 다시 이사를 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집에 있는 책을 다 읽었을까? 물론 아니다. 읽지 못함에 대해 마음이 켕기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지하철을 그만두고 읽을 책을 준비하는 거라고 이유를 댔다. 남들 저축하듯이 책사는 것도 나에게는 저축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부터 책만 읽는다 해도 죽을 때까지 다 못 읽고 죽을 거다. 그럼 어떻게 하지? 그래서 장가가서 마누라랑 분업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문학이나 예술 분야, 나는 사회과학 분야를 읽고 서로 얘기 해주기, 그렇지만 이것도 아마 안 될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나 만큼 책을 좋아하는 여자가 도대체 어디 있을까 싶다. 또 그래서 또 이유를 만들었다. 언제 장가를 갈지 모르지만 내 아이들에게 읽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안방이고 거실이고 어디고간에 책들이 널려 있으면 즈이들이 안 읽고 배길텐가? 그리고 나는 30에 책 읽는 길을 접어들었다면, 책 읽는 애비 만나서 10세나 20세 때 책을 접하게 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이런 것 마저 아니더라도 책이 있으면 그저 좋다. 책에는 어떤 기운이 있는 것 같고, 책과 연계된 나의 삶이 이어져 있어서 이미 책은 나의 일부인 것이다. 한때는 책 속에 숨겨져 있는 사람들과 세계의 영감을 받는다고 잠을 책방에서 책을 베고 잤었던 적도 있듯, 책방에 앉아 있으면 그냥 좋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병이다 싶다. 지난 6월에 책을 도대체 얼마나 샀는가 셈을 해봤더니 인터넷서점에서 117만원어치 그리고 교보문고와 헌책방에서 한 5-6만원 어치. 이렇게 책값으로 나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문과 계간지의 서평 난에서 사야할 책들을 골라내고, 절판된 책을 구하기 위해 헌 책방을 뒤지거나 선생님들이나 도서관에서 빌려 제본을 뜨고 하면서 살고 있다. 여전히 언제 읽을지 모르는 책이지만 새 책을 만나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더구나 헌책방에서 귀한 책들을 찾을 때의 기쁨은 좋은 친구 만난 만큼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 정도는 심한 중병인 듯 싶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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