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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3.06.27 10:34

아직 이런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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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대문을 열면 매일 여행 온 듯한 느낌이 든다. 푸른 숲을 지나온 바람과 우거진 나무들 그리고 파란 하늘에 두둥실 흐르는 하얀 구름들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아 우리집 마당에 서 있어도 마치 여행 중에 민박하고 있는 집처럼 낯설다. 그러나 아침마다 만나는 이 낯선 느낌은 여름밤 담을 넘어와 잠을 깨워도 싫지 않은 바이올린 선율처럼 신선하다.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시작한 시골생활이 생각보다 훨씬 즐겁다. 집 구조가 70년대 식이니까 생각도 70년대 수준으로 바꾸고 경제수준도 낮추어야 한다고 다짐할 때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살아보니 빡빡한 서울생활보다 넉넉한 여유가 있어 참으로 편하다.

하지만 시골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편하다기보다는 놀랍다. 지난 일요일은 참 바빴다. 동네 아줌마가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장날마다 쑥이나 약초를 내다 파는 아줌마가 혼자 산에 갔다가 머리를 다쳐서 돌아왔다. 그 아줌마가 다친 사실을 내가 제일 먼저 알았기 때문에 몹시 바빴던 것이다. 왼쪽 관자놀이 위가 깨어진 듯 생긴 상처는 내 손바닥 길이만큼 컸고 패인 폭은 손바닥 넓이의 반이나 되어 보기에 어찌나 끔찍하던지 고개가 저절로 돌려졌다. 다행히 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어떻게 지혈이 되어 피가 많이 흐르지 않았다. 그 아줌마는 아흔여덟 된 할머니랑 단둘이 사는 사람이라 병원에 함께 갈 사람이 없어서 우리 차로 가자고 했더니 싫다고 거절했다.

그 아줌마는 그렇게 심하게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약초를 한 자루나 메고 돌아왔고 나에게 준다면서 예쁜 꽃나무 몇 포기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 상처만 보아도 죽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되어 조바심쳤는데 오히려 본인은 태평이었다. 우선 응급처치로 내가 소독약을 발라주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에 다시 병원에 가자고 했더니 비가 와서 또 못 간다며 버티었다.

마을 사람들 누구도 그 일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내가 보건소 의사에게 물었더니 머리의 상처를 그냥 두면 위험하다고 해서 화요일에는  억지로 차에 태워 읍내 병원에 갔다. 그 아줌마는 생활보호 대상자라 치료비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치료비가 없다니 그제서야 치료를 받았고 약도 받아먹었다.

그렇게 크게 다친 아줌마가 매일 하던 일은 여전히 했다. 머리를 다친 날도 산에서 캐 온 약초를 다듬고 저녁에는 아궁이에 군불을 지폈다. 다음날 아침에는 골목을 쓴 후에 낮에는  할머니가 내놓은 똥 묻은 옷을 냇가에서 방망이로 두들겨서 빨았다. 그리고 야생꽈리가 있는 곳을 나에게 알려주며 빨리 캐다 심으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더욱이 놀라운 일은 다친 지 36시간이 지나고 병원에 갔는데도 상처는 빨리 아물었고 오늘은 다시 봉합 수술까지 받게 되었다.

자동차를 탄 적이 별로 없어 읍내까지 다녀오는데 겨우 20분 정도 걸리는 시간이었으나 첫날 병원에 다녀오다가 차멀미를 해서 우리 차 뒷자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런데도 돈 안내고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오늘도 나랑 함께 병원에 가자고 조른다.  

어쩌면 병원에 간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치료비가 무서워서 아예 병원 갈 생각조차 하지 않을까. 그토록 끔찍하던 상처가 사흘만에 아물고 별 탈이 없는지 정말 이상하다. 그런 사람들 속에 섞여 살면서 나는 콩꽃이 예쁘다, 꽈리나무에 봉지가 열었으니 좋다고 자랑하며 떠들 수가 없다. 비옷을 입고 김매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비 오는 날은 빗소리가 아름답다는 말을 했다가는 아마도 매맞을 것이다. 이제는 산과 들을 적시며 내리는 오늘 이 비가 농사에 좋은지 나쁜지 우선 생각해본다.

70년대 방식으로 살겠다며 다짐하고 왔는데 이 마을에는 지금도 60년대 생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시골풍경처럼 낯설지만 들녘을 지나는 고운 바람이 옥수수 잎사귀를 흔들고 가듯 도시생활에 찌든 내 마음을 흔들며 자꾸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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