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2016-0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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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LA중앙일보_유홍준 |
[추모의 글] 아픔을 구슬로 만든 당신
유홍준/명지대 석좌교수·미술사가
[LA중앙일보] 발행 2016/01/20 미주판 8면
우리 시대의 ‘참스승’ 신영복 선생님이 기어이 가셨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건 아니지만 이제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허전할 수가 없습니다. 부음이 전해진 그 날 밤부터 인터넷에는 선생님의 서거를 애도하는 글이 쉼 없이 올라왔습니다.
선생님은 삶과 글과 강의와 글씨로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일깨움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생의 창조적 열정이 고조에 달하는 나이 27세부터 47세까지 20여 년을 어두운 감옥에서 보내셨으면서도 단 한 번도 당신이 받은 고통에 대하여 불평을 말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살을 찌르는 아픔을 견디고 마침내 영롱한 구슬을 만들어 내는 진주조개처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세상에 내보이셨습니다.
“얼마 전에 매우 크고 건장한 황소 한 마리가 수레에 잔뜩 짐을 싣고 이 ‘끝동네’에 들어왔습니다. 더운 코를 불면서 부지런히 걸어오는 황소가 우리에게 맨 먼저 안겨준 감동은 한마디로 우람한 동력이었습니다. 꿈틀거리는 힘살과 묵중한 발걸음이 만드는 원시적 생명력은 분명 타이탄이나 8톤 덤프에는 없는 위대함이었습니다. 야윈 마음에는 황소 한 마리의 활기도 보듬기에 버거워 가슴이 벅찹니다.”
가누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은 이런 글을 읽으면서 가볍게 살았던 나의 삶을 얼마나 부끄러워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이 ‘더불어 숲’ ‘나무야 나무야’에서 ‘마지막 강의’까지 인간의 본분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무문관(無門關)의 수도사만이 전할 수 있는 인생교본이었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명문이란 “가득 담았지만 뺄 것이 없고, 축약했지만 빠진 것이 없는 글”이라 했는데 선생님의 글이야말로 그러했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책을 정말로 아껴가며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씨로 말하자면 한국서예사에 홀연히 나타난 금자탑이었습니다. ‘여럿이 함께’ ‘길벗 삼천리’ ‘처음처럼’…. 네다섯 글자로 화두(話頭)를 던지고 그 아래에 풀이하여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받혀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라고 풀이를 달은 작품들은 한글 서예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거친 듯 리듬이 있고, 기울어진 획들이 서로 의지하는 글자의 구성은 한마디로 ‘어깨동무체’였습니다. 나는 선생님이 이룩한 글씨의 경지를 유배객 원교 이광사,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로 이어지는 ‘유배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선생님의 서예에는 ‘관계의 철학’이 있음을 나는 압니다.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 버릴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스스로 호를 지어 우이(牛耳)라 하고, ‘쇠귀’라고 쓰면서 소처럼 우직하기를 원한다고 하셨지만 우리에게 비친 당신의 삶은 그 반대였습니다. 선생님은 중국인들이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는 루쉰(魯迅)의 전기를 번역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선생님이야 말로 우리나라의 루쉰이십니다.
고단한 삶이 이어지는 힘들고 강퍅한 세상을 살면서도 선생님 같은 분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었는지 모릅니다. 나는 선생님처럼 결이 고운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모든 것을 과거형으로 돌리자니 너무도 허전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남기신 말씀과 글씨들은 저 하늘의 북극성처럼 언제나 우리 머리 위에서 밝은 빛을 발할 겁니다.
“선생님! 편히 가십시오. 선생님과 한 생을 같이 살았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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