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커타 공항에 내리면서 나는 제일 먼저 시간을 맞추는 일에서부터 인도를 시작했습니다. 손목시계를 풀고 시계바늘을 돌려 시차를 조정하면서 문득 평소에 천동설(天動說)로 생활한다던 당신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우리는 평소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천동설로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네 시간이 채 못 되는 시차지만 이 시차는 지구는 역시 돌고 있다는 지동설(地動說)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시차와 지동설은 여행객에 지나지 않는 나의 과학일 뿐, 이곳에서 낮과 밤을 보내고 맞는 인도 사람들에게는 역시 천동설이 과학임에 틀림없습니다.
내가 인도에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이 바로 이 '생각의 시차'입니다. 무심하게 살고 있던 천동설을 반성하고 다시 지동설이라는 땅의 원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땅 위에 건설한 도시의 일상을 직시하게 됩니다.
인도의 새벽 하늘은 까마귀들이 열어줍니다. 우리 나라 까마귀보다 몸집도 작고 색깔도 잿빛이지만 가장 큰 차이는 인도에서는 까마귀가 길조(吉鳥)라는 사실입니다. 까마귀에 대한 생각부터 바꿔야 하듯 인도에서는 바꿔야 할 일상적 관념이 한둘이 아닙니다.
요란한 까마귀 울음소리가 열어놓은 하늘 아래로 캘커타의 공간이 드러납니다. 어둠이 걷히는 땅 위로 오래된 자동차가 달리고, 역시 오래된 전차가 달리고, 인력거가 달립니다. 일찍이 작은 어촌이던 이곳에 대영제국의 동인도회사가 들어서면서 건설된 도시가 캘커타입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이 물러가고 난 다음 식민 도시로부터 어딘가를 향해 변화해가고 있는 모습이 오늘의 캘커타입니다.
생각하면 캘커타는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겪은 곳입니다. 작은 어촌에서 번영의 식민 도시로, 다시 추락하는 잿빛 공간으로 운명이 유전(流轉)되어 왔습니다. 어쨌든 작은 어촌이던 옛날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지금은 과거 식민지 시절의 모습과 그것으로부터 급속하게 추락한 모습이 뒤섞여 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기념관이 지금도 흰 대리석 살결을 뽐내며 아름답게 서 있는가 하면, 시민공원 중앙에는 영국의 인도 지배 거점이던 윌리엄 요새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세계 경영의 기지였던 이곳 캘커타에는 그 시절의 번영을 증거하는 빅토리아풍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건물 몇몇을 제외하고는 온통 빛 바랜 잿빛 공간입니다. 이 잿빛 공간은 이따금 저절로 무너져내리는 낡은 건물과 그 건물 안팎을 가득 메우고 있는 남루한 모습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나는 이 잿빛 도시에서 엉뚱하게도 일본인의 망언이 떠올랐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경영이 조선의 근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주장이 어떠한 근거를 갖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국과 영국의 자본이 떠나버리고 난 뒤 배후지(背後地)마저 사라져버린 식민 도시의 운명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개울물이 먼저 얼 듯이 식민 모국의 도시보다 더 급속하고 참혹하게 쇠락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러나 그것의 가장 참담한 모습은 도로나 건물이 아니라 잿빛 공간에 남겨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도로변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방글라데시 난민들이 대부분이라고 하지만 쇠락한 도시 공간은 그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남루한 잉여 인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남루한 모습을 가난이라고 속단하는 것이 잘못일 수도 있습니다. 백색과 패션에 길들여진 나의 시각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자리가 있거나 없거나에 관계없이 뿌리뽑힌 삶의 모습은 비극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남루한 삶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거대한 소외 공간으로 추락하고 있다면 이것은 개인의 문제이거나 한 도시의 문제가 아니라 수세기 동안 도도하게 분류(奔流)해온 근대화의 이면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나는 캘커타의 남루한 잿빛 공간을 거닐며 남의 돈으로, 또 남의 필요 때문에 건설된 도시의 운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시란 무엇이며, 도시란 어떻게 건설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의 도시는 과연 어떤 운명을 더듬어갈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도의 농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도시보다 훨씬 적은 부(富)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지만 그곳은 뿌리뽑힌 잿빛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농촌 사람들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도시 사람들보다 오히려 못한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들의 남루함에 초점을 맞추는 장치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메마르고 척박한 전답 위에서 허리 굽혀 일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삶에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든든함이 있었습니다. 누군들 산야에 서 있는 나무를 두고 그 목숨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습니다. 아무리 척박한 땅에 서 있는 나무라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캘커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생각하면 캘커타만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일제의 식민 시절을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서울을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캘커타는 사상과 예술의 도시이며 동시에 '인도의 얼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식민 도시에서 인도의 정직한 얼굴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무엇을 예술이라 하며 어떤 생각을 사상이라고 하는 지 혼란스러워집니다. 인도가 안겨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은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웠던가 봅니다. 이를 안타까워한 유학생의 친절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내게 인도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어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의 '사랑의 선교회'와 '죽음을 기다리는 집'이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거처하는 성당에는 늦은 밤인데도 환히 불 밝힌 기도실에서 사랑의 기도가 올려지고 있었습니다. 외부인들의 방문에 익숙한 어린이들의 구김살 하나 없이 우리를 맞아주기도 하고 은은한 찬송가 선율이 평화와 안식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시선은 자꾸만 바깥으로 옮겨갔습니다. 성당 바깥의 도로와 빈촌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손길이 채 미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시차를 조절하지 못한 나의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나의 걱정과는 달리 그들은 결코 성당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거나 사랑의 손길을 고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신이 인도에 온다면 맨 먼저 걸인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손들에게 포위될지도 모릅니다. 빈 그릇을 앞에 놓고 동전 한 닢을 구걸하는 사람을 시야에서 지우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인도에서 거지만 보고 돌아갈지고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의 당당함에 충격받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수많은 수도승들의 탁발(托鉢)전통을 모르는 나로서는 그러한 당당함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가난과 남루는 물론이며 심지어 삶과 죽음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인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정서가 우리에게는 없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선의 대상으로 비하하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마치 산야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국이 만들어낸 도시 공간이 인도의 공간이 아니듯이 자선과 선교가 '인도의 방법'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의 생가에도 안내되었습니다. 캘커타에서 받은 나의 충격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가를 깨우쳐주려는 배려였던 것 같습니다. 라빈드라 바라티 예술대학으로 변한 그의 생가는 넓고 큰 저택이었습니다. 타고르의 유복한 유년 시적을 짐작케 하였습니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양지를 피하여 학생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와 마찬가지로 암울한 식민지 시절을 살아가고 있는 조선 청년들에게 일찍이 아시아의 등불이었던 코리아를 상기시키고 그 등불이 다시 켜지는 날을 기약하도록 격려해주던 타고르. 나는 그의 동상 앞에 서서 사진을 찍고 학생들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학생들과 나 사이에는 이미 열중할 화제를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식민 시대 이후 사회 구조의 변화보다 더 급속하게 해체되어 버린 것이 개인의 정신이며 사회 의식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러한 정신 영역의 급변은 어쩌면 충분히 열중할 수 있는 공동의 관심사마저 황폐화시켜 놓았다는 느낌을 받을 뿐이었습니다. "지성의 맑은 물줄기가 메마른 벌판에서 길 잃지 말라"고 당부하던 타고르의 시구가 생각났습니다. 이 시구는 이제 바라티 예술대학 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의미로 읽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캘커타를 떠나기 전에 후글리 강을 찾아갔습니다. 후글리 강은 갠지스 강이 바다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캘커타를 감싸안고 흘러가는 강입니다. 강변에 늘어서 빈민 지역을 거쳐 호왈라교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난간에 기대어 강물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다리 위로는 교량을 가득 메운 인파가 도도히 흐르고 다리 아래로는 갠지스 강이 말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히말라야에서 녹아내린 눈물이 그 긴 여정 동안에 수많은 강물들과 한몸이 되어 이제 바다를 만나러 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느리고 어두운 강물이지만 단 한 걸음도 후퇴하는 법 없이 꾸준히 이곳에 당도하여 그 무거운 가슴을 바다에 내려놓고 있습니다.
가난은 아름다움을 묻어버리는 어둠이 되기도 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빛이 되기도 합니다. 호왈라 교를 가득히 메운 인파 속에서 나는 한 개인의 가난과는 달리 도시의 가난은 결코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빛이 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도시의 가난은 그 의상의 가난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번영하고 있는 도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화려한 의상을 한 꺼풀씩 벗어갈 때 최후로 남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에 의하여 도시는 판단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도시의 자생성과 식민성의 구조를 주목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인도를 찾아올 때는 많은 것을 벗어두고 올 것을 권합니다. 먼저 시계를 풀어두고 오기 바랍니다. 그리고 옷을 벗어두고 와야 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입혀놓은 보이지 않는 옷까지 벗어 두고 와야 합니다. 그리고 이 호왈라 교 위의 인파 속에서부터 시작해도 좋습니다. 인간이 겹겹의 의상과 욕망을 하나하나 벗으면 최후로 남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육탈(肉脫)한 도시의 철골(鐵骨)과 적라(赤裸)가 된 정신의 뼈대를 맞대면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사회의 자립적 구조와 삶의 원초적 내용을 직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서울과 캘커타는 네 시간이 채 안 되는 시차를 두고 직항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울을 먼저 보고 난 다음 캘커타를 보고 다시 서울을 보는 순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세기를 찾아나선 나에게 인도는 참으로 망연한 여행지였습니다. 인도의 세기(世紀)는 읽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인도의 얼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10억의 인구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인도를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21세기에 대한 독법(讀法)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비단 인도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인도를 비롯한 제3의 대륙을 외면한 채 세계를 이야기하고 새로운 세기에 관한 담론을 진행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피라미드의 뿔만을 피라미드라 하지 않는다면, 거대한 밑동까지를 합하여 피라미드라 일컫는다면 그렇습니다.
인도에서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는 지금 몇 시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