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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난중일기 - 충무공 이순신

  멀리 동경에서 온 외사촌 동생과 함께 삼청공원을 걸었다. 꽃이 지고 잎이 돋아나는 신록의 질서를 바라보며 함께 천천히 봄길을 걸어다녔다. 저녁을 먹고 세종문화회관 앞으로 오니 뮤지칼 이순신을 공연하고 있었다.오늘이 바로 그분의 생일이었다. 잠시 묵념을 하고 전에 <난중일기>를 읽고 북리뷰를 해 둔 것을 함께 나누기로 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2539일 동안 있었던 전쟁의 상황을 기록해놓은 글이다.
모두 7권의 책과 1권의 부록으로 남아있다. 국보 76호로 지정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충무공의 친필 초고로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충무공은 여기에 다만 <日記 >라고 썼을 뿐 제목을 따로 붙이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정조19년, 1795년 완성된 <이 충무공 전서> 중 5-8권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다. 이때부터 편의상 그 내용이 <난중일기>라고 불리운다.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새벽에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16세기 중반의 조선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훈구세력에게 신진 사림파가 내몰렸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았고 살아남은 신진 사류들은 세상을 등졌다. 그가 태어나던 해에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소윤과 대윤의 피 비린내 나는 정쟁으로 신진 사림들이 다시 화를 당한 비극의 해였다.

이순신의 할아버지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었고, 아버지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서울을 떠나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내려갔다. 서울의 사대부 집안이 향리의 처가 혹은 외가를 찾아 내려간다는 것은 곧, 주류 사회에서의 이탈을 뜻하는 것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기까지 아산에서 자랐다. 시골 사람이었다. 이미 사화에 연루된 집안이어서 문관으로 입신하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상대적으로 덜 까다로운 무관이 그가 바라는 바가 되었다. 28세때 처음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으나, 낙마하는 바람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부러진 다라를 버드나무 껍데기로 싸매고 태연했다는 것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일화다.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내고 4년 후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였다.

맨 처음 그가 받은 벼슬은 함경도 동구비보 (堡), 머나먼 국경수비대의 초급장교였다. 보는 성도 아니고 진도 아닌 야전초소와 같은 곳이었다. 국경을 지키기 위해 4년 동안 추위와 싸우면서 끊임없이 여진족의 도발에 맞서야했다.

두 번째는 종8품의 미관말직인 훈련원 봉사, 그 후에 충청병사의 군관을 거쳐 전라도 고흥 발포진의 수군만호로 발령이 났다. 수군과 맺은 최초의 인연이었으나 2년 후에 파직을 당한다. 전날 상관의 인사 청탁을 거절한 보복성 인사였으나 4달후에 다시 복직이 된다.

42세에 다시 함경도 조산보의 만호로 전근, 그 다음해에는 두만강어귀의 녹둔도 둔전관에 임명되었다. 빈약한 병력에 여진의 침범은 끝없이 이어져 양민들의 피해가 많아지자 절도사는 그에게 책임을 물어 이순신은 해임되었고 결국 첫 번째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45세가 되던 1589년 정읍현감이 되었다. 종6품이었다. 8개월 후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했다. 종6품에서 종3품으로의 진급이 너무 빠르다고 사간원이 반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정계의 든든한 후원자가 있거나 당파에 소속되어 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 진도 군수로 발령이 났다. 곧이어 가리포 첨사로 전직되었고 부임도 전에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그런 과정에 인사의 난맥상이 보이고 개인적으로 마음을 붙이고 공무를 돌볼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쉰이 가까운 나이에 수시로 바뀌는 교지를 들고 변방의 임지로 떠돌아야했다. 이처럼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까지 그는 비주류의 설움을 안고 살았다.

송백(松柏)은 서리를 당한 연후에 그 푸르름을 안다고, 이순신의 진가는 전쟁이라는 국난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전라좌수사로 지역의 수군책임자가 된 그는  바다건너 소식에 민감해졌고, 조정에서는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해 보았으나 각 당파가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으며 서둘러 거북선을 건조하고, 군기를 엄정하게 세워 나갔으며, 판옥선의 건조와 수리에도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전쟁이 터졌고 그는 7년 전쟁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역사에 그 이름을 깊이 새겼다.

기록을  보면 그는 자주 앓고 있었고 ‘온백원’이라는 약을 자주 복용했는데, 이는 소화기 계통의 약으로 병의 원인이 ‘스트레스’에서 오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불러 일으킨다. 여건이 따라주지 못하는데도 전쟁을 치러야했다. 적의 침입을 막아내야 했고 백성의 생활까지 보살펴야 했다. 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중압감에 시달렸다. ·

명랑대첩을 앞두고 몇 번이나 기절하여 인사불성이 되었던 그였지만 모든 고통을 굽히지 않는 정신으로 이겨냈다.

그는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을 하였으며, 전쟁 중에 어머니와 막내아들 ‘면’을 잃었다. 그는 외로웠다. 그러나 새벽 두시에는 일어나서 병서를 보며 연구를 하였고 거북선같은 혁신 제품을 개발했다. 각 전투마다 다양한 전술을 구사했다. 피나는 연구와 노력의 결실이었다. 한산대첩의 학익진은 육전의 전술이었다. 장군은 병서와 역사서 읽기로 이러한 전술을 활용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배움과 연구에 철저했던 노력파였다.

그는 자주 울었다. 그는 또한 매우 인간적이기도 해서 군기를 엄정히 하기위해 도망병을 참하기도 했고, 소를 훔친 어부를 베기도 했다. 그러나 딱한 병사의 사정을 듣고는 옷을 벗어주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인간에 닿아있었다. 이러한 그의 인간정신이 어떻게 길러졌을까?  아마 오랜 세월 소외되고 어려운 길을 살아낸 그가 경험으로 체득한 인정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고난을 겪었기에 누구보다도 상대의 심경을 잘 읽고 남의 불행을 먼저 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곁에 끝까지 머무는 사람들이 있었고 한 시대의 영웅으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인물이 된 것이다.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9일 새벽2시부터 정오까지 조-명 연합함대가 퇴로를 차단당한 순천의 고니시 군을 구출하러왔던 일본의 구원군을 맞아 싸운 전투였다.  7년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였으며 이날 새벽에 동이 틀 무렵 이순신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 해전에서의 큰 승리는 전쟁의 참상에 망연자실해 있던 백성을 구해냈고 위태로운 국가의 운명을 구했을 뿐 아니라 “조선은 수군이 막강한 나라” 라는 인식을 주변국가에 심어주었다.  일본은 오늘날까지 적국의 명장이었던 이순신의 위업을 기리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겨 숭앙하고 있다. 그의 진중일기는 11월 17일에 끝이나 있고 그는 죽기 직전까지 충실하게 일기를 썼다.


일기에서 간추린 연보:
47세 ( 선조 24년 1591년)-전라좌수사로 임명되다.
48세 (선조 25년 1592년)-4월;임진왜란이 일어나다.
                         5월;옥포,함포,적진포 해전에서 승리
                         6월;사천 당포 당항포및 율포 해전에서 승리하다.
                              왼편어깨에 적의 총탄을 맞았으나 치유되다.
                         7월;한산도 앞바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다.
                         9월;부산해전에서 승리하다.
49세 (선조 26년 1593년)-7월;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기다.
                         8월;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되다.
50세 (선조 27년 1594년)-10월;장문포의 왜군을 수륙으로 협공하다.
53세 (선조 30년 1597년)-3월;원균의 모함과 당쟁의 희생이 되어                                서울로 끌려가 감옥에 갇히다. 
                          4월;도원수 권율밑에서 백의종군하다.
                         8월;3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다.
                         9월;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다.
54세 (선조 31년 1598년)-2월;수군 진영을 고금도로 옮기다.
                         11월 19일 (양력 12월 16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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