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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맡에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을 두고 잠이 든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삶은 매우 소중하고 또한 달콤한 것입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몸을 아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머리 역시 계속 써줘야 합니다.

존 버닝햄은 심오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줄 아는 73살의 할아버지입니다. 그는“2차 대전으로 1년간 학교를 가지 않았을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릴 때 학교를 열 번도 넘게 옮겨 다닌 후 섬머 힐 스쿨에서 겨우 자유와 평화를 되찾았지요. 그리고 그림 동화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가 만들어낸 토끼 알도와 검피 아저씨, 지각대장 존, 할아버지의 의자는 이상하게 마음속 깊이 들어와 감동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렇게 공감의 파장을 길게 이어가는 작가는 그리 흔하지 않지요.

그는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에서 과거의 글과 지금 나이든 사람들의 말을 통해 “나이 듦”이라는 주제를 그려 놓았습니다.

사실, 늙은 사람에게는 몇 년의 시간도 짧은 오후처럼 지나가 버립니다. 올해 93살인 한 극작가는 여든이 지나고부터는 5분마다 아침을 먹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나이듦은 예고 없이 들이닥쳐 우리를 쓰러뜨리고 쓴 웃음을 짓게 합니다. 우스꽝스러워진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나이가 들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대로 든 사람은 이제 한 가지 운동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일명, 안경 찾아 삼만리 운동이지요.

나는 무엇이든 오래된 것이 좋습니다. 오래된 친구, 옛 시절, 오래된 관습, 오래된 책, 그리고 오래된 와인...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가장 큰 혜택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때는 삶의 목적이었던 것이 골치 덩어리가 되어 버리다니 참 이상한 일이지요? 물론 진정한 사랑과는 비교할 수도 없겠지만 소위 ‘첫 눈에 반하는 것’도 아주 귀찮은 일일 뿐입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좋은 점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젊었을 때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축복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건강, 시력, 청력, 걸을 수 있는 능력, 마음대로 운전하고 여행 다닐 수 있다는 것 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됩니다. 스스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그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10년 가까이 즐겨 다니던 잘 아는 분의 별장에 머무는 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언제나 主人(소유주)이라 하지 않고 住人(머무는 사람)이라 하시던 겸손하고 온유한 분이셨습니다. 우린 그곳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 도르래를 이용해서 물을 건너 다녔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겪어 보았으나 이 물 맑고 바람 좋은 땅에 단풍이 들면 그 빛이 찬란하다 못해 마음속에 불을 불러 오고는 했었지요. 그 가을 어느날, 냇물을 따라가며 길게 이어진 오솔 길을 몇 번이나 가고 오고 또 가며 옛 기억들을 정리했습니다.

어떤 순간들이 눈앞에 사진처럼 선명하게 펼쳐졌습니다. 처음 그곳에 가던 날, 선녀탕으로 바로 뛰어들었던 일도 생각나고, 오솔길에서 흘깃 살모사를 본 듯해서 등산화의 끈이 풀어져서 그런 것도 모르고 죽어라 뛰었던 일도 생각났습니다. 화롯불에 고구마도 구워보고, 옥수수도 장작불로 삶고, 돼지감자도 캐고.... 뒷동산에서 따다 담근 돌배주로 밤 깊도록 도란도란 이야기도 했었지요. 달이 떠오를 땐 달을 보고 별이 빛날 때는 말없이 별만 바라보았습니다. 모닥불 피워놓고 어두움 속에서 불꽃을 따라 춤을 추기도 했었지요.

이제 다시 그곳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듯 합니다. 지나간 아름다운 날들을 다시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 눈물이 나려고 했습니다. 말은 없었지만 그곳에 오래 머물러 계셨던 주인장은 이미 정들었던 모든 것들과 작별인사를 다 해두신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마음의 눈으로 지나간 시간들을 바라다 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분명 그곳에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들이 있었을 텐데요, 그 추억도 조용히 가슴속에 묻어두기로 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앉아서 앞을 응시하는 일이 많아집니다. 그렇다고 이 일이 창의적인 일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들, 기억, 시 몇 줄, 옛날의 끔찍한 말장난들, 조미료 병에 적힌 문구나 학교에서 배웠던 찬송가 같은 것들이 머릿속을 마구 떠다닙니다. 곧 머릿속은 편안한 백지상태처럼 되고 몸은 딱 움직이기 싫을 만큼만 나른해 집니다. 영국에서는 나이든 사람들이 까페에 혼자 있을 때 그렇게 공간을 응시합니다. 노인들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자세로, 가끔씩 인사를 하거나 불평을 늘어놓을 뿐,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집에 가서는 약간의 음식을 먹은 다음 곧 잠자리에 들어버립니다. (존 모티어)

시간이 흐르고 있다고 당신이 말을 했던가요? 그렇지 않답니다.  시간은 머물러 있는 것이고, 흐르는 것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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