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2000-0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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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중앙일보 |
아름다운 얼굴을 위하여[유권자에 띄운다] 정치인은 우리의 정직한 얼굴입니다 - 신영복
봄은 얼굴을 가꾸는 계절입니다. 겨우내 나목(裸木)으로 섰던 나무들도 새로운 잎으로 모습을 가꾸기 시작합니다. 4월은 잔인한 계절이라지만 황무지도 초원을 준비합니다. 초목이나 벌판만이 아닙니다. 봄은 사람들도 얼굴을 가꾸는 계절입니다. 봄볕에 수그린 이마를 들어 얼었던 살결을 깨우고 저마다 새봄의 미소를 일구는 계절입니다.
아름다운 얼굴은 아름다운 나무나 푸른 초원과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름다운 얼굴을 만드는 방법에 있어서 그르치는 일이 한 둘이 아닙니다. 오로지 '얼굴'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나마 '나의 얼굴'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면 나의 얼굴은 나의 얼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얼굴은 부모형제의 얼굴에도 있고, 가까운 벗, 나아가서는 선생님의 얼굴에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더 정직한 나의 얼굴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치 지도자들의 얼굴은 우리들의 얼굴을 대표합니다. 우리사회를 대표하고 우리지역을 대표하는 우리의 얼굴입니다. 우리가 지지하든 지탄하든 상관없이 그들의 얼굴은 결국 우리의 얼굴이 됩니다. 우리가 가꾸고 우리가 선택한 우리들의 자화상이며 그런 점에서 우리들의 가장 정직한 얼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랑스럽지 못한 사람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 서둘러 이사간 사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정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법과 권력이 되어 우리의 삶을 원천적으로 규제하는 구조가 바로 정치입니다. 정치인의 얼굴이 나의 얼굴이 아니라고 거부하거나 냉소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벗을 수 없는 무쇠 탈이 되어 우리의 얼굴에 덧씌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씌워진 무쇠 탈을 벗겨내고 우리의 얼굴을 찾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 왔는지 알고 있으며 지금도 결국 내 얼굴에 침 뱉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탄의 언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뼈아픈 희생이었으며 가슴아픈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봄바람을 흔히 꽃샘바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이름입니다. 봄바람은 가지를 흔들어 뿌리를 깨우는 바람입니다. 긴 겨울잠으로부터 뿌리를 깨워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하는 바람입니다. 무성한 잎새와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하기 위한 바람입니다. 꽃을 시샘하는 바람이 아니라 꽃을 세우기 위한 '꽃세움 바람'입니다.
새봄과 함께 바야흐로 총선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북풍(北風) 병풍(兵風) 향풍(鄕風) 금풍(金風) 연풍(緣風) 학풍(學風) 숱한 바람이 우리의 얼굴을 칩니다. 이 혼탁한 소용돌이가 한바탕 지나가고 나면 우리는 또 한번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 봄도 역시 참담한 4월로 끝날지 모른다는 우려를 금치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바람 속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눈감지 말고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깨워야 할 뿌리는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선택하고 가꾸어야 할 우리의 얼굴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냉정하게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뼈아픈 희생을 치르지 않기 위하여, 가슴아픈 불행을 답습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아름다운 얼굴을 위하여. 우리의 아름다운 사회를 위하여.
중앙일보 2000.3.30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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