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10원 벌이는 자신만만하단다. 물지게를 져다 주기, 연탄을 날라다 주기 등 산비탈 동네에 사는 어린이들이 끼어들 수 있는 노력봉사의 사례금이 우리의 수입원인 셈인데, 더러는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집안 식구들의 심부름 값이 섞여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우리들의 고충이었다.
They told me they were confident of earning 10 won a month. Carrying water-carrying yoke, delivering pressed briquettes, and doing various chores for the people living in the foothill was the main source of their income. It often included tips for running errands for their parents or siblings, a bewildering predicament for them.
이렇게 하여 쌓인 우리의 저금은 내가 구속되던 1968년 7월까지 2,300원이 되리라고 기억된다. 내가 육사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1966년 6월과 7월 두 달, 그리고 67년 2월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해 있던 한 달, 그리고 그 외에 한두 번 가량 적금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언젠가 내가 받은 원고료 수입에서 그동안의 부족액 약 300원 정도를 불입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조대식인가 이규승인가 자기의 무슨 수입 중에서 20원 가량 초과 불입한 일도 있었다.
I remember we had saved 2,300 won by July, 1968, when I was arrested. We skipped the two months of June and July in 1966, when I had military training at Korean Military Academy, one month of February in 1967, when I was hospitalized in Seoul Army Hospital, and a couple more months. Instead, I once supplied the shortage of about 300 won with the payment I got for an article, and either Cho, Dae-sik or Lee, Kyu-seung paid the overdue fees of 20 won from his extra in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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