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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7.01.02 08:49

흙이 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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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와서 만난 신당리에 사는 윤 할머니의 얼굴은 안동 하회탈에서 볼 수 있는
해학적이고 낙천적인 모습 그대로다. 내가 처음 할머니를 만났을 때 그 분은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다. 몸이 불편해 보이는데도 항상 자신감에 넘쳐 무엇인가를 사람들에게 풍성하게 나눠주기를 좋아했던 그분의 모습은 늘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던 할머니가 3년 전부터는 무릎이 아예 없어져, 손으로 바닥을 짚고 하체를 질질 끌고
다니는 앉은뱅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할머니 집안에는 할머니처럼 낮은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부엌, 침실, 거실, 화장실, 싱크대, 그리고 수도꼭지까지도 할머니의 키에 맞게 낮아졌다.
할머니는 누군가가 업어서 차에 태워주지 않으면 교회도 나올 수 없어, 할머니를 자주 뵐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를 위해 늘 기도했다. 기도할 때마다 그분이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냈을까, 싶어 늘 마음이 안타까웠다.
나는 짐처럼 지고 있던 마음을 털기 위해 남편을 졸라 할머니를 찾아갔다. 방 안에서 누워 있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마당에서 햇볕을 쬐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하자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 찾아보는데, 앞집에 사는 조카며느리가 2백여 미터 떨어진 들깨 밭으로 들깨를 베러 가셨다고 했다.
아니, 걷지도 못하는 노인이 들깨 밭에 갔다니!
나는 할머니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들깨 밭에 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할머니를 보고 가야지, 싶어 들깨 밭으로 향했다. 할머니가 다리를 끌며 이 길을 걷기만 해도 하루가 다 지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점점 들깨 밭으로 다가가자 할머니는 보이지 않고 들깨 단만 들썩들썩 거렸다.
그곳으로 가자 하체를 노란 비옷으로 감싸고 열심히 들깨를 베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는 들깨 밭으로 오는 도중에 있는 도랑에 아랫도리가 젖을까 봐 비옷을 입었다고 한다. 나는 지하도 근처에서 장애인들이 물건을 파는 것은 보았어도, 밭일을 그것도 머리가 하얗게 센 다리도 없는 노인이 하는 모습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나는 마음을 세차게 흔드는 전율을 느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할머니는 앉아서 들깨를 다부지게 여몄고, 할머니의 앉은키보다 훨씬 큰 들깨를 시원스럽게 베어내었다. 뜻밖에 나타난 나를 본 할머니는 일손을 멈추고 이야기나 나누자며 앞서서 기어가셨다. 나는 할머니를 훌쩍 안아서 걸어 내려가고 싶었지만 노인의 의지를 꺾고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봐 내색을 않고 따라 걸었다.
할머니는 여느 때와 같이 당당하고 명랑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한겨울 내내 보관해도 썩지 않는 밤나무 싹을 세 그루나 틔워 놓았다고, 한 그루 갖다 심으라는 말씀까지 하셨다.
위로라도 해 드리려고 왔던 나는 오히려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내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힘든 세상, 어두운 마음이 판치는 요즘에 할머니의 삶은 정말로 위대해 보였다. 항상 가난을 불편해 하며 투덜거리거나,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 또는 무엇인가 남을 위해 한다고 소리치며 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다 같이 그 할머니의 삶을 떠올려 보며 새해 설계를 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열린 창으로 바라본 다양한 삶의 풍경'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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